ㄴ에 대한 기억
글씨를 쓰는 것이 업이 되면서
받침 ㄴ을 쓸 때 종종 생각나는 고등학교 같은 반 급우가 있다.
새학기에 처음 부임해서 들어온 여자 사회선생님은 말했다.
"나는 시건방진 사람이예요. 그래서 다른 사람이 시건방진 꼴은 보지 못해요"
정말 시건방진 어투로 카리스마를 발산하려는 듯 과장된 제스처까지 곁들였던
나름 인상적이었던 자기소개였다.
자기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을 철저히 배척했던
사회성이 의심스러운 사회 선생님의 눈에 그 친구의 글씨는 아마 반역같았는 모양이다.
제출한 숙제에 씌여진 그 친구의 필체는 ㄴ 받침을 직선에 가까운 느낌이었는데
누구도 그 ㄴ을 ㄴ이 아닌 글자로 오인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사회 선생님의 기준에 그 친구의 ㄴ은 미달이었다.
ㄴ같지 않은 (선생님 주관) ㄴ에 대한 선생님의 분노는 20분을 넘겼고
결국은 ㄴ을 그렇게 쓰라고 가르친 부모 욕에 이르렀다.
내내 고개를 숙이고 듣기만 하던 그 친구는
결국 누르지 못한 미약한 울컥임으로 어깨를 떨며 말했다.
"저는 할아버지께 글씨를 배웠어요. "
그 말이 시건방지게 들렸는지 사회 선생님은
무식한 늙은이가 글씨도 바르게 못가르쳤는데 버릇도 못가르쳤다며
'니네 할아버지가 뭔데~~!!!!'를 외치며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길길이 뛰셨고
나중까지 남은 뒤끝을 발휘해 시험지에 써 있는 그 친구의 글씨체를 문제삼아
알아볼 수 없다며 주관식문제를 0점 처리하셨다. (그런 게 가능했던 시대였다.)
그 친구의 할아버지는 오랫동안 글씨를 쓰신 서예가 선생님이셨다는 이야기는 나중에 알게되었다.
그리고 나도 글씨 공부를 하면서 그 친구의 ㄴ과 비슷한 느낌의 멋스러운 옛 필체들을 많이 보게 되었다.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난, 내 일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끔 ㄴ을 쓰다가, 아니면 비슷한 ㄴ을 볼 때마다
겨우겨우 떨림을 억누그런 그 애의 두 어깨와 무릎 위 꽉 쥐어 하얗게 질렸던 작은 주먹이 떠오른다.
(그 상황에서도 예의를 지키며 참아내던 그 인내심에 존경심이 들기도 한다. 나라면..... 음....)
그리고 그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자동으로
친하지도,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도 않는 그 친구에 대한 걱정 한자락이 남는다.
글씨를 쓸 때마다 그 일이 기억나지는 않을까?
글씨를 써서 누군가에게 보여줘야 하는 상황에 망설임이 생기진 않았을까?
나는 기억하는 이 일이 부디 그 친구에게는 잊혀진 일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