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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승창 Dec 30. 2021

김근태 선배와의 인연1

-침묵으로 무게 잡고 앉았던 그 사람이 김근태

  

*저 나름 김근태 선배를 돌아보려 합니다. 사적인 인연을 풀어 놓으며 그를 제 방식대로 추모하려 합니다. 공중파 어디서도 김근태를 위한 프로그램이 없어 화가 난다는 트위터의 어떤 멘션을 보고 나서 종합적으로 그를 위한 이야기를 할 엄두는 나지 않지만 영원히 '선배', '형'으로 불리우는 그를, 제 방식으로는 이야기 할 수 있겠다 싶어서 이렇게 적어 봅니다.






김근태 선배와의 인연은 참 오래되었다. 김근태 선배와 나와의 첫 만남을 김근태 선배 자신은 전혀 기억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1984년 대구택시 사건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갔을 지 몰라도 당시 택시 노동자들의 사정은 열악하기 그지 없었다.  당시 대구의 택시노동자들은 사납금 문제로 파업을  벌여 9명이 구속되었다. 대구 택시 사건은 다른 지역의 택시노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전국 여러 곳에서 택시노동자들의 파업이 줄을 이었다. 대부분 사납금인하 부제완화 노조결성방해 중지 등 비슷비슷한 요구조건이었다. 당시의 대구택시 사건은 택시노동자들이 출근 시간에 택시를 몰고나와 거리에 세움으로써 대구교통 전체를 마비시키는 초유의 사태로 발전함에 따라 전국적 사건이 된 일이기도 하다. 그 오랜 싸움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택시노동자들의 형편은 전혀 나아지지 않고 있지만...




이 사건이 있기 한 석달전 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교내시위관련으로 구속되었다가 출소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는데,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시작해 보겠다고 작은 모임을 만들어 의논중인 때이기도 했다. 그 무렵 학교 선배 한 사람이 당시 구로동에 있던 시범택시에서 분규가 있었는데 사례조사를 해보면 좋겠다면서 관련된 사람들도 인터뷰할 수 있게 연결해 주었다. 그래서 몇 사람이서 인터뷰할 사람, 자료조사할 사람 등을 정해서 조사를 마친 후 이를 토대로 간단한 리플렛을 만들어 배포한 적이 있었다. 노동운동의 영역을 확장해야 하며, 그 중 운수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태나 조건에 비추어 시급한 영역이라는 취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뭐 지금은 내용이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23살 나이에 쓴 것이니 지금 들여다 보면 필시 조악한 수준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전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마치 예측이라도 한 듯(아 나는 전혀 아니지만 조사해 보라던 그 선배는 이런 감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자료조사를 통한 문서의 작성방향도 일러주었으니까) 석달 후에 대구택시 사건이 났고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 그 선배를 통해서 민청련쪽에서 그 리플렛을 작성한 사람들을 찾고 있다며 약속을 잡아 놓았으니 가보라고 하였다. 당시 노동운동을 한다고 나름 보안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니까, 당연히 민청련쪽의 소수 몇사람을 보는 것으로 생각하고 사무실을 방문하게 되었다. 함께 작업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지금 잘 알려진 정치인 중의 한 사람이다. ㅎㅎ 벌써 30년 가까이 지난 일이니 공소시효 같은 것은 다 지났겠지만 그래도 본인에게 물어 보지 않은 상태라^^ 이름은..


누구를 만나게 되나 하고 사무실을 기웃거리는 데, 둘은 깜작 놀랐다. 세상에 민청련 중앙위원회라든가 뭐라든가 해서 20여명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 리플렛에 관한 짧은 청문회같은 것이었다. 기라성같은 운동선배들 앞에서 주눅들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다른 내용들은 지금 도통 기억나지 않고, 다만 지금도 기억나는 세사람 중의 한 사람이 김근태 선배였다. 두 사람은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서 우리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던 사람들인데, 그 중 한 분이 이해찬 총리였고, 다른 한 분이 유시민대표였다. 물론 질문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으며 답변내용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우씨 디게 똑똑하네 하는 인상만 남아 있었다. 그 분들 역시 전혀 기억하지 못할 것이 틀림없다^^ 그런 가운데 회의 내내 진중한 태도로 앉아서 경청하면서 한마디 말이 없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김근태선배였다. 긴 침묵끝에 마지막에 그저 수고했다는 인사만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당시에 내가 가졌던 김근태 선배에 대한 인상은 '되게 무게 잡는다'였다. 그런 그가 얼마 지나지 않아, '고문'사건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어 그 분인데, 이런 나쁜 놈들, 죽일 놈들, 무게 잡던 그 사람이 참 강건한 사람이기도 했구나 하는 생각들을 하며 그 시간을 지나왔던 것 같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나는 김근태 선배와 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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