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성 PD 다이어리(3)
- 햇빛 쨍쨍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내리는 비를 맞은 경험, 모두 있지 않나요?
제작 프로그램이 많지 않다면 채널 연간 예산 중 대부분을 프로그램 구매하는데 지출한다. 편성 라인업을 구성하는 방법이야 무궁무진하지만, 대부분의 유료(케이블) 채널은 각 장르에 맞는 메인 콘텐츠와 서브 콘텐츠로 라인업을 구성한다. 화제성과 시의성을 고려하여 시청률을 견인할 메인 레귤러 프로그램이 있는 반면, 그 외의 시간대에는 비교적 저렴하지만 꾸준한 스테디셀러를 찾는다. 규모가 큰 채널은 대중적인 선택을, 규모가 작은 채널에선 우리 채널을 즐겨 시청하는 시청자의 성향에 더 집중하게 된다. 이에 대해선 추후에 더 자세하게 얘기해 보도록 하고. 결론은 유료 채널에서는 구매 프로그램의 양이 매우 많다는 말이다.
신입 사원 때 몸 담갔던 채널은 제작과 구매가 공존하는 예능 채널이었다. 그럼에도 유료 채널 특성상 구매 프로그램의 비중이 두 배 가까이 높았다. 아직 업무에 미숙한 신입의 주 업무는 비교적 간단한 프로그램 심의 검수였다. 지상파 등 메인 채널에서 기방영된 프로그램이라지만 혹시 모를 오류를 대비해 꼼꼼하게 검수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졌다. 신입이었기에 더더욱. 그렇게 채널에서 구매한 프로그램의 방송을 준비하면서 제법 많은 종류의 프로그램과 회차를 검수했고 적어도 심의나 오류로 인한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햇빛 쨍쨍 평화로운 편성 하늘에 갑자기 비가 쏟아 내리기 시작한다. 연예 뉴스에서 심상치 않은 헤드라인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릇된 성관념에서 비롯된 ‘미투 운동‘을 시작으로 ’마약 적발‘, ’탈세‘, ’학폭‘ 등 연예계 문제가 연이어 터진 것이다. 기사를 보며 나 또한 천사의 가면 속 악마의 행동에 크게 분노했다. 이 사건들이 나의 업과 연결이 될 줄은 생각도 못한 채 말이다. 다음 날 출근을 했는데 굳은 표정을 한 선배가 조용히 불렀다.
“어제 뉴스 보셨죠? ㅇㅇㅇ 출연한 회차들 편성에서 다 빼야 하니 전 회차 확인해서 리스트 작성해 주세요, ASAP!"
그렇다, 사건을 일으킨 연예인들이 우리 방송에 나오고 있었다. 그로부터 한동안 나는 그간 검수했던 모든 프로그램을 다시 살펴봐야만 했다. 일차적으로 웬만한 출연 회차들은 검색을 통해 걸러낼 수 있다. 그렇지만 예능이란 무엇이던가. 자료 화면이 엄청 많다. 게다가 트렌드에 민감하고 화제가 되는 건 프로그램 장르 중 가장 빠르게 적용하다 보니 순간적인 짤로 출연하기도 한다. 수백 개의 회차를 다 꼼꼼하게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기억을 더듬어 그들의 얼굴이 등장했던 회차를 찾아내려 노력했다. 한 사건의 가해자를 걷어내면 이어서 터지는 다른 사건들. 그렇게 사건이 터질 때마다 회차를 빼고 넣기를 한동안 반복했다.
사실 편성 담당자로서 겪는 여러 일 중 하나다. 그저 방송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기에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다. 열심히 방송을 만든 제작진과 다른 출연진과 그 외 스태프에게 직접적인 책임은 없겠지만 당연히 감수해야 할 일이다. 중요한 논점은 사건에 있다. 당시의 사건들은 매우 심각했고 잔인했으며 나쁜 범죄였다. 지금 생각해도 여전히 분노가 끓어오르며 감히 피해자의 고통을 가늠할 수도 없다. 못된 마음으로 행하는 그릇된 행동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달아 피해를 야기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건은 끊이질 않는다. 부디 크나큰 상처를 남기고 모두의 노력을 헛되게 하는 사건들이 더는 생기지 않았음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