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성 PD 다이어리(2)
원래는 라디오 PD가 꿈이었다. 고등학생 때 큰 위로를 받았던 라디오를 업 삼고 싶었다. 그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디어 계열 학과에 진학을 하였으나, 막상 대학에 가니 마음이 식었는지 꿈에 대한 포기와 후회를 반복했다. 뭐, 결국 28살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리고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고 지금 편성 PD로 일하고 있는 방송사에 입사했다.
면접과 PT를 하며 사전조사는 했지만 편성을 이해했을 리는 만무하다. 그저 취업이 되었다는 안도감과 높은 건물에 내가 일할 책상이 생겼다는 사실이 뿌듯했을 뿐.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건 내겐 큰 어려움이었지만, 돈벌이가 현실이 되었으니 정신 똑띠 차리자는 생각만 가득했다.
약 한 달간의 신입사원 교육이 끝나자 비로소 첫 출근을 할 수 있었다. 내가 배치받은 채널은 예능 채널이었다. 회사의 메인 채널이자 오리지널 콘텐츠를 제작하는 채널이기도 했다. 지금에야 유료 채널에서도 오리지널 콘텐츠 경쟁이 피 튀기고 있지만, 불과 4-5년 전만 해도 유료 채널에서는 대게 지상파 등 메이저 방송사의 프로그램이 라인업의 메인이었기에, 채널에서 오리지널 콘텐츠를 제작한다는 건 모두가 경험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신입 사원일 때야 뭐가 뭔지도 모를 때니 별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당시 꾸준히 콘텐츠를 제작하는 채널에 배치받은 건 내게는 큰 행운이었다.
대부분의 신입사원이 그렇듯, 나 또한 긴장과 열의를 품고 우선 이 집단에 적응하는데 집중했다. 낯선 환경, 새로운 사람들, 냉정한 결과는 사회 초년생에겐 버거운 현실이었지만, 다행히도 채널의 상사와 선배들은 인격적으로든, 업무적으로든 좋은 분들이어서 많은 도움을 받았고 하나씩 차근히 배울 수 있었다.
신입사원인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했다. 프로그램 검수와 방송 소재 관리, 방송 용어 익히기 등. 프로그램 검수는 방송을 송출하기 전 프로그램의 품질을 체크하는 일이다. 방송 심의에 부적합한 내용은 없는지, 화면 및 음향 노이즈는 없는지, 프로그램 식자 등 방송 소재 완성도에 문제는 없는지 등을 확인하는 업무다. 이러한 방송 적합 여부를 유심히 확인해야 하는 일인데, 사실 남들 눈에는 TV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여기는 근무시간에 합법적으로 TV를 보고 합법적으로 이어폰을 낄 수 있는 곳이었던 것이다!
사실 TV 시청을 즐기지 않았음에도 TV 프로그램 보는 게 일이라니 좋은 듯 아닌 듯 묘하게 신났다. 지인들에게 회사에서 TV 본다고 자랑하면서 괜스레 TV 박사가 된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하찮은(?) 뿌듯함 그런 걸 느꼈다. 머지않은 미래에 닥칠 시련은 감히 상상도 못 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