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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적요 Feb 24. 2023

그래서 편성 PD가 뭔데?

편성 PD 다이어리(1)

나는 5년 차 편성 PD다.


타인에게 내 직업을 말하면 늘 따르는 질문이 있다.

“그래서... PD라는 거지? 어떤 프로그램 만들었어?”

“프로그램을 만드는 건 아니고 만들어진 프로그램의 방송 시간을 결정하는 일이야”

‘아…’라는 짙은 내뱉음과 함께 이내 곧 침묵이 흐르고 우리의 대화는 다른 주제로 넘어간다.


‘편성’과 ‘PD’는 나름 익숙한 단어지만, 이를 조합한 ‘편성 PD’란 직업은 막상 들으면 무슨 일을 하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나 또한 그랬으니까. 고백하자면 첫 출근하는 날까지도 어떤 업무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신입사원을 거쳐 해가 지나고 또 지나 5년 차가 된 지금에서야 비로소 나를 먹고살게 하는 이 직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5년이란 시간 동안 편성 PD로서 겪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꺼내볼까 한다. 내년 아니 당장 다음 달에도 여전히 편성 PD일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내게 새로운 동력이 되길 기대하면서.


웹 콘텐츠와 OTT의 등장으로 다양한 형태의 콘텐츠를 무한생성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아직까지 TV 프로그램은 우리의 삶과 맞닿아 있다. 지인과의 대화에서도 가장 흔한 소재도 TV 프로그램 아니었던가.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가 소비하는 하나의 TV 프로그램이 탄생하고 방영하기까지는 수많은 역할이 얽혀 있다. 먼저 출연진, TV 프로그램의 얼굴이자 동력이다. 출연진은 우리가 프로그램을 시청하는데 중요한 요소임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이니. 다음은 제작진, TV 방송의 두뇌이자 뿌리다. 그들의 아이디어와 역량에 따라 같은 주제여도 프로그램의 방향성은 천차만별이다. 게다가 요즘 예능에서는 제작진이 노출되어 하나의 캐릭터가 되니 대중들이 그들의 존재까지 즐기지 않은가. 이처럼 현장에서 출연진과 제작진, 수많은 스텝들의 노력이 닿아 하나의 멋진 프로그램이 탄생한다.


그럼 이렇게 고생 끝에 완성된 이 프로그램은 대체 언제 방영하는 걸까? 몇 날 며칠 몇 시 몇 분? 이 시간대를 결정하는 게 편성 PD의 주 역할이다. 우리 머릿속에는 '월화 밤 10시는 드라마, 토요일 오후 6시는 무도, 일요일 밤 9시는 개콘'이라는 인식이 아직도 있다. 편성 PD들이 만들어 낸 산물이다. 단순히 마음에 드는 시간에 꼽아선 안 되고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이 프로그램이 이 시간대에서 성공할 수 있는 요인은 무엇인지, 이 시간대의 시청자에게 우리 출연진이 어필할 수 있는지 혹은 이 장르가 먹힐지 등 크고 작은 물음과 해답을 찾아 편성 시간대를 결정한다.


일을 시작하면서 (같은 직무 선배들에게) 방송국의 실세는 편성 PD라는 말을 들었다. 고생해서 만든 프로그램의 방송 시간을 결정하는 역할이니 자연스레 힘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이 말을 의심했지만 새로 들어온 어린 후배에게 나름대로 자부심을 심어주려고 한 말로 돌려 돌려 이해했다. 이후 내가 겪은 바로는 당연히도 실세가 아니었다.


편성 PD의 역할은 편성 전략을 세우는 일 외에도 여러 가지다. 채널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대게 편성 PD는 그 채널의 살림을 맡는다. 청결을 유지하고 개성 있는 이미지(채널 브랜딩)를 만들기 위해 잘 어울리는 옷과 스타일(네트워크 디자인)을 준비해야 하고, 가계부(예산 관리)도 써야 하며, 맛있으면서도 건강한 먹거리(프로그램 소싱)도 사야 하면서도 가끔은 서프라이즈 이벤트(채널 프로모션)도 준비하는 로맨티시스트여야 한다. 물론 현대 시민이기에 법과 도덕(방송법, 심의)을 지켜야 함은 물론이고.


이렇게 거창하게 편성 PD를 얘기했지만 사실 내가 하는 일이 그리 거창하지 않다. 나는 MPP(Multiple Program Provider, 복수 채널사용 사업자)의 작은 채널, 어쩌면 열에 여덟은 모르는 채널의 편성표를 짜고 있고, 제작한 프로그램을 편성하기보다는 구매한 프로그램을 편성하는 일이 대다수다. 실세를 바라지도 않지만 절대 실세일 수가 없단 얘기다. 오히려 편성하고 싶은 프로그램을 사다 달라고 애원하는 처지이며, 큰 채널의 성공을 위해 집안 살림을 줄여가며 내조하기도 한다. 해보고 싶은 게 있어도 현실의 벽에 부딪혀 언제일지 모르는 다음을 기약한 적도 부지기수다. 때문에 자주 찾아오는 현타를 피할 수도 없고. 게다가 앞서 언급했던 OTT의 등장과 발전으로 더 이상 TV 채널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의문이 생기는 현실이다. 최악의 경우, 내가 그만두지 않더라도 먼저 일을 빼앗길지도?! (실제로 부장님은 챗지피티한테 편성표 짜달라고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더 늦기 전에 편성 일을 하며 느낀 희로애락의 감정과 경험과 기억을 남기고 싶었다. 이제부터 내 직업의 하루하루를 담아보려 한다. 어쩌면 고점을 찍고 내려가는 곳에 몸 담은 나의 하루, 그럼에도 소중했던 나의 하루에 대한 기록이다. 누군가에겐 시시하고 보편적인 일이지도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신선한 공감을 선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결국 이야기할 크고 작은 에피소드의 본질은 단연 나만의 것이 아닐 테니 말이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버텨온 또 다가올 하루를 맞이하는 모든 이들과 안녕을 나누고 싶다.



자, 그럼 먼저 우리 모두의 첫 경험, 신입사원 때로 돌아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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