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회.복

08. 전복죽

by 갱그리

지금은 휴직했지만, 이전에 회사를 다닐 때 우리 팀의 팀장님은 술에 취하면 늘 팀원을 칭찬하는 버릇이 있었다. 욕하고 꼬장부리는 것보다야 좋은 습관이지만, 팀장님은 늘 같은 칭찬만 반복하곤 해서 어떤 때에는 '이게 칭찬이야, 욕이야' 싶기도 했다. 팀장님은 으레, 'A과장은 최고로 꼼꼼해' 'B과장은 정말 똑똑해, B과장 손에 안 풀리는 문제가 없어' 'C대리는 아이디어 뱅크야, 뱅크!' 하고 칭찬을 이어나가다가 막내인 내 차례에 이르면 늘 이렇게 이야기하곤 했다. '아.. 갱이는 타자가 빨라! 엄청 빨라!'


팀장님의 칭찬은 5년째 똑같았다. 똑똑하고, 꼼꼼하고, 아이디어 뱅크인 선배들 사이에서 5년째 타자만 빠른 나. 타자 빠른 거 외엔 잘하는게 없다는 소리로도 들리지만, 뭐 사실이건 아니건, 내 타자는 정말 빠르다. 한컴 타자게임을 즐겨하기도 했고, 얼마 전 '졸업식'을 거행한 게임 <큐플레이(구 퀴즈퀴즈)>에서도 타자 게임만 열심히 했었다. 키보드를 칠 때 나는 '타타타타'하는 소리가 좋기도 했고, 내 타고난 조급증 때문에 느린 것이 성미에 안 맞았던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알겠지만 나는 성격이 정말 급한 편이다. 생각 난 건 바로 실행에 옮겨야 한다. 운동할 때도 이런 성격은 늘 마찬가지여서, '다리를 천천히 올렸다 천천히 내리라.'는 강사의 지시에도 늘 다리를 재빨리 올렸다 훽 내려버린다. 그러다 근육이 다친다고 늘 한 소리를 듣지만 쉽게 고쳐지지가 않는다. 머리로 '천천히, 천천히' 외쳐도 몸은 늘 성미에 따라 움직이고 만다. 얼마 전엔 점심을 먹는데 아기가 보채자 안그래도 급한 마음이 더 다급해져 방금 퍼 놓은 고봉밥을 우걱우걱 먹었다. 다 먹고나서 아기를 안는데 너무 급하게 먹었던지 왈칵하고 먹었던 것을 다 게워내고야 말았다. 그 이후론 위염이 도졌는지, 위가 부었는지 계속 따끔따끔하니 배가 아파오고, 먹은 것이 없는데도 체기가 돌았다. 급기야는 머리가 어지럽고 두통이 심해져 그 다음 날엔 친정엄마에게 SOS를 치고 말았다.


IMG_1808.JPG 하트 전복죽 :)

다음 날 달려 온 친정엄마가 갖고 온 건 전복죽이었다. 죽은 배달시켜 먹을테니 싸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는데도 엄마는 직접 만든 것과 사 먹는 건 다르다며 기어코 죽을 만들어 왔다. 마침 아기도 4개월에 접어 들어 이유식을 이제 막 시작한 때였다. 그래서 그런지 엄마가 만든 전복죽을 먹고있는 내 자신이 이유식을 먹는 아기와 같아진 느낌이었다.


성격 급한 내가 작정하고 마음의 숨을 죽여가며 오래오래 끓여 만드는 이유식. 느린 건 정말이지 싫어하는데도, 숟가락을 쪽쪽 빨아가며 먹는 아기의 모습이 대견하고 귀여워 이유식을 만드는 게 힘들지 않았다. 엄마가 해준 죽을 먹고, 나는 또 힘을 내서 아기의 이유식을 만들고. 사랑이 대를 잇는다는 게 이런 건가.


물론 작정하고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요리는 엄마로서도 즐겁지 않다. 힘이 넘칠 때야 이유식을 즐겁게 만든다지만 그렇지 않고 지친 날에는 그날의 이유식을 건너뛰기도 한다. 매일의 일상을 지켜주는 편이 좋다고는 하는데, 나는 그보다 나 자신의 체력을 유지하는 데에 더 주안점을 둔다. 그런 맥락에서 친정엄마에게도 '엄마의 엄마'라는 희생을 강요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되도록 도움을 받지 않으려 애를 썼건만, 오늘의 전복죽은 반칙이다. 너무 따뜻하고, 정말이지 고소하다.


전복죽 한 그릇에 으쌰-하고 기운을 차리고, 도와주러 온 엄마와 하루종일 수다를 떨며 아기를 보았다. 친정에 머물며 산후조리하던 때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도란도란 수다소리가 끊이지 않기에 즐거웠는데 이윽고 해가 저물어가는 오후가 되자 친정엄마는 다시 문밖으로 나섰다. 말소리가 없는 집안은 이전처럼 고요하다. 문이 탕, 닫히고 난 뒤의 이 적막 때문에 누군가 다녀 간 날에는 늘 조금씩 눈물이 고이지만, 내 등 뒤로 옹알거리는 아기 목소리에 다시 눈이 번쩍 뜨인다. 아자, 다시 힘내자. 신에게는 아직 식지 않은 전복죽이 한 사발이나 남아있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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