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너무 소중한, 라면

03. 신.계.치 라면

by 갱그리

고백하건대 내 일생 일대의 음식은 사실 라면이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도서관을 중심으로 라면 전문점이 우후죽순 생겨났지만, 그래도 나는 일편단심 매점 라면 매니아였다. 라면 전문점에서 파는 해물라면, 짬뽕라면 같은 것들은 특이하고 고급스러웠지만 어딘가 라면답지 않아 한 두 번 호기심에나 먹어보았지, 이후엔 굳이 찾아 먹지 않았다. 내가 공부하러 다니던 도서관 지하에는 수영장과 매점이 같이 있었는데,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다 허기를 채우러 매점에 내려가면 수영장의 염소 냄새와 매점의 라면 냄새가 늘 뒤엉켜 있었다. 그 때문에 나는 지금도 수영장에 가면, 왠지 모르게 컵라면이라도 찾아 먹어야 할 것 같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한다.


집마다 선호하는 라면의 종류가 다르다는 사실은 결혼하고나서야 처음 알았다. 우리 집은 일편단심 신라면이었고 간혹 특이한 게 먹고 싶을 땐 너구리를 끓였지만, 남편은 주로 삼양라면이었다. 남편은 라면을 끓일 때 집에 있는 온갖 재료를 모두 투하했다. 만두나 떡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어느 날은 마카로니를 넣고 끓인 적도 있었다. 양념은 알싸하게 고춧가루와 생고추를 첨가해 그럴 듯 했지만, 마카로니는... 정말 아니었다.


신촌에 가면 '신계치' 전문점이 있는데, 신라면/계란/치즈라면의 준말이다. 나는 이 라면을 사실 엄마에게서 먼저 배웠다. 우리 집의 라면은 그야말로 클래식하다. 고춧가루나 후추, 고추장 등을 더하지 않는다. '백주부'가 유행한 이래로 아빠가 갑작스럽게 고추장이나 파 등을 더해 라면을 끓였지만, 사실 우리 집의 라면 규칙은 "있는 그대로 먹는다"였다.


라면엔 김밥이 진리!


그러던 어느 날인가, 엄마가 김밥을 싸다가 남은 치즈를 라면 국물에 투하했다. 내가 중학교 때의 일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클래식 라면'을 고집해왔던 나는 아무래도 치즈 때문에 누래진 라면을 먹을 용기가 안났지만, 생각 외로 맛있다는 오빠의 반응에 한 술 조심스럽게 떠 먹어 보았다. 그랬더니 이게 왠 일인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 듯 했다. 라면 가득 퍼진 치즈가 국물을 더욱 고소하게 만들어 냈다. 김치가 절로 들어가는 느끼함이었지만, 그건 그것대로 김치의 새콤함까지 더해져 젓가락질을 멈출 수 없게 했다. 간혹 국물에서 덜 풀어진 치즈 덩어리를 만나면 행운인 듯 집어 들었다. 내 생애 최초의 치즈라면이었다.


신기하게도 삼양라면을 고집하는 남편도 치즈 라면을 먹는 날엔 신라면을 끓인다. 신라면과 치즈의 궁합만큼은 다른 라면이 결코 깰 수 없는 철옹성이 아닌가 싶다. 오늘은 엄마와 신라면을 하나 끓여 반으로 나누고, 노오란 슬라이드 치즈 한 장을 반으로 잘라 각자의 라면 위로 얹어내어 점심을 먹었다. 후루룩, 먹으며 엄마는 "옛날엔 라면이 귀한 음식이었는데." 하며 웃었다. 지금 내겐 엄마와 나누어 먹는 이 라면이 참 귀하다고, 부끄러워 미처 말하지는 못했지만 여기에는 글로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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