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2
한 달 간의 짧은 비건 체험을 마치고 저에게는 여러 가지 변화가 생겼습니다.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익숙했던 사물과 상황을 바라보는 저의 시선이었습니다.
이 체험 기간을 거치면서 저는 제가 먹는 음식들에 대해 조금 더 주의 깊게 살피게 되었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우리는 종종 우리 몸에 들어가는 음식에 대해 지나치게 무관심합니다.
무엇이 들어있고,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지고, 그것이 어떤 생명으로부터 온 것인지와 같은 기본적인 정보들 말이지요.
비건이 먹을 수 있는 식품인지 알아보기 위해 저는 자주 성분표를 들여다보아야 했습니다.
글자와 숫자로 표기된 것들은 주로 그 식품을 구성하는 성분과 영양정보 등을 담고 있지만, 그 내용을 꼼꼼하게 살펴보면 더욱 많은 정보와 의문에 맞닿게 됩니다.
빼곡한 글씨 속에서 발견하는 여러 나라의 이름들과 의외의 재료들, 수많은 동물성 재료들, 읽어도 알 수 없는 각종 첨가물, 팜유, GMO, 유기농, 포장 재질 등 화려한 포장지 뒷면의 내용들은 물건 가격 이외에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진짜 대가가 무엇인지도 알려줍니다.
제 생활 속에서 음식 이외에 동물로부터 비롯된 것들은 무엇이 있는지도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동물을 먹기만 하지 않습니다. 가죽옷을 입기 위해 사냥하고 사육하며, 화장품과 의약품을 생산하기 위해 다양한 생체실험을 하고, 사람들의 눈요기로 삼기 위해 동물원과 수족관에 전시하고 혹사시킵니다.
이렇듯 보이지 않는 동물들의 흔적은 냉장고 외에도 옷장과 신발장, 화장대 안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동물의 부산물이 테니스 공이나 벽지, 반창고, 필름처럼 전혀 예측하지 못한 물건들에도 들어간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비거니즘의 궁극적 지향점이 단순히 육식을 멀리하는 식생활의 추구가 아닌, 동물로부터 비롯된 모든 제품과 서비스를 지양하는 삶의 방식에 있듯이 비건을 체험한 이후 저의 의식도 자연스럽게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식생활의 변화에서 시작된 관심은 그렇게 제가 소비하는 것 하나하나를 돌아보게 했고 화장품이나 운동화를 살 때도 가능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동물을 이용하지 않은 제품을 고르는 새로운 습관으로 이어졌습니다.
눈앞에 놓인 음식들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졌습니다.
오랜만에 재회한 고기와 달걀 반찬들은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맛있겠다’라는 즉각적인 반응과 함께 생각의 한 켠에 밀쳐두었던 것들이 떠올라 혼란스러운 상태가 되곤 했습니다. 예민한 반응일지는 모르겠지만 고기 냄새에도 민감해진 것 같았고요.
본래 형태를 알 수 없게 조리된 음식들은 좀 나았지만 덩어리 고기에는 더 이상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고기를 바라보고 있으면 이따금씩 그 동물이 떠올랐으니까요.
길을 걷다가 꼬챙이에 줄줄이 꿰어져 빙글빙글 돌아가는 전기구이 통닭을 보면 살아있는 닭들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육식이라는 필터를 빼고 본 세상은 거대한 육식주의의 제국 같았습니다.
어느 지역이건 음식점들이 모여있는 골목에는 고기를 주력으로 판매하는 식당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고깃집이 아닌 식당에서도 고기가 들어있지 않은 메뉴를 찾기가 힘들지요.
배달 어플과 식품을 판매하는 온-오프라인 매장들, 검색창의 메인 광고, TV와 길거리 입간판에 이르기까지 발길과 눈길 닿는 모든 곳에서 고기와 고기로 만든 음식들을 광고하고 그 소비를 부추깁니다.
‘회식은 무조건 고깃집’, ‘후한 대접을 해야 할 때는 소고기’, ‘기념일엔 스테이크’, ‘소주에 삼겹살’, ‘맥주와 치킨’, ‘야식은 족발’처럼 특정한 상황과의 조합은 육식을 생활의 일부로 공식화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생활 깊숙이 만연한 육식 문화 속에서 과도하게 육식을 즐기고 있습니다.
미처 인식하기조차 어려운 육식 문화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이유는 우리가 현재의 시스템 안에서 자랐으며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육식주의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다 먹기 때문에 일반적’ 이며, ‘어렸을 때부터 먹어 온 것이어서 자연스럽’ 고,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으로서 건강을 위해 필요하다.’ 라는 식의 암묵적인 합리화를 통해 우리 사회는 육식을 정당화해 왔습니다. 광고와 방송은 우리에게 친숙한 인물들을 통해 육식의 모습들을 끊임없이 보여주면서 이 사회에 육식주의가 계속 건재할 수 있도록 보장합니다.
미디어가 육식주의의 비가시성을 지키는 또 다른 방법은 ‘생략’ 입니다.
고기를 얻기 위해 도축해야 하는 연간 100억 마리의 동물들과 현대 축산업의 관행이 야기하는 온갖 끔찍한 결과에 관한 이야기들은 모든 보도와 방송의 영역에서 철저하게 제외됩니다.
이런 굳건한 육식주의 문화는 결과적으로 고기가 생명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가리게 되고 이런 비가시성은 고기를 먹을 때 느낄 수 있는 도덕적 불편함을 완화시키거나 생물을 떠올리며 응당 느껴야 하는 우리의 기본적인 감각조차 마비시킵니다.
고기가 동물에게서 나온다는 것은 알지만 동물이 고기가 되기까지의 단계들에 대해서 우리는 굳이 짚어보려 하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만 수억 마리의 가축이 인간의 먹거리를 위해 사육되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그들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우리는 놀라우리만큼 무관심합니다. 사육과정에서 벌어지는 각종 비윤리적인 행위들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이죠. 우리 대부분이 의식의 어느 차원에서는 육식의 이면에서 정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잘 알려진 대로 축산업은 지구 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오염과 막대한 폐기물을 배출하는 산업입니다.
전 세계의 모든 운송수단에서 나온 배기가스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온실가스를 뿜어내고 있지요.
게다가 축산업은 지표면 전체 농지의 70%를 사용해서 매년 600억 마리의 가축을 먹여 인간의 식탁에 오르게 합니다. 만약 그 면적의 땅에 사람을 위한 식량을 재배한다면 세계의 기아는 사라질 것입니다.
사스, 메르스,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은 서식지를 잃은 야생동물이 인간에게 노출되면서 새롭게 생겨난 질병입니다. 서식지 파괴 역시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며 축산에 필요한 경작지 조성과 그에 따른 산림 훼손이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힙니다.
기후 위기는 전 세계에서 체감할 수 있는 위협으로 나타나고 있고 환경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은 이제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는 요구 사항이 되었습니다. 고기를 먹으면서 환경을 생각한다는 말에는 커다란 모순이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육식의 굴레 안에서 자신들과 지구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채식 지향은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환경운동가나 뚜렷한 신념으로 무장한 특정인들의 전유가 아닙니다.
지구의 환경은 무서운 속도로 빠르게 변하고 있고 느슨한 낙관만으로 관망하기에는 우리 앞에 놓인 대가가 너무나 커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위기의 책임이 우리 인류 모두에게 있듯이 채식의 실천은 점차 선택이 아닌 필수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밥상 위의 메뉴가 더 이상 개인의 취향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채식 지향의 선택이 많은 생명들을 구한다면 과연 우리 몸에는 무엇이 좋을까요?
한 달간의 비건 체험을 거치면서 가장 신기했던 것은 제 몸에서 일어난 변화들이었습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얼마 전부터는 고기를 많이 먹으면 소화가 잘 되지 않아 소화제를 먹거나 다음날까지 속이 더부룩한 일이 많았는데 채식을 하는 동안 뱃속은 내내 조용했고 소화도 잘 되었습니다.
몇 년 간 큰 변화가 없었던 콜레스테롤 수치가 떨어지고 고혈압의 경계에 있던 혈압도 정상 범위로 내려왔습니다. 거기에 덤으로 뱃살이 빠지고 피부가 좋아지는 긍정적인 효과도 얻게 되었지요.
여러 해 동안 누적되어 온 각종 성인병 증상들이 없어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무척 즐거웠습니다.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으니 제 자신에게도 해를 가하지 않는 보너스가 생긴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저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이지만 전 세계의 몇몇 선도적인 건강, 영양전문 기관들에서는 균형 잡힌 채식 식단이 심장마비, 암, 당뇨, 신장질환 등의 질병에 걸릴 위험을 현저하게 낮춘다는 연구 결과들을 이미 발표한 바 있습니다.
- part.3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