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두르지 않을 수 없어서 난 오늘 자라에 갔다. 그곳엔 아주 많은 옷과 아주 많은 사람이 있었다. 나 또한 아주 많은 옷을 들고, 하나씩 입어보았고, 신중하게 팬츠와 스웨터를 고르고 내친김에 하늘하늘한 여름 옷까지 샀다. 한겨울에 여름 옷은 오버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세일 기간이라 반값이었으므로, 뭐랄까, 사지 않을 수 없어서 샀다. 기분은 좋다. 소비를 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법이니까. 하지만 새로 산 옷이 주는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다. 소비로 얻는 기쁨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세일하는 스파 브랜드의 옷을 사는 류의 소비는 행복의 유효기간이 아주 짧다. 몇 번 입지 않아 그 행복은 닳아 없어지기 때문이다. 촌스럽게 느껴지는 데는 채 반년도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더 많이 그 패션을 사랑할수록 유행의 변화를 더 민감하게 느끼고, 더 빨리 스스로를 촌스럽다고 느끼기 쉽다. 그것이 패션의 세계이고, 트렌드의 법칙이다.
트렌드의 법칙을 조금이라도 빗겨 가기 위해 나름대로 무난한, 그래서 오래 유행타지 않고 입을 수 있는 기본 템을 고르기 위해 애썼다. 검은색 터틀넥 스웨터와 감색 와이드 슬렉스. 이 옷들은 올해가 지나 다음 겨울이 와도 깨끗하게 보관해 두었다 꺼내어 잘 다려 입고 싶다. 그렇게 하고 '싶다'고 희망하는 건 이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의미일 거다. 우리가 당면한 의류 소비의 현실은 생각보다 더 빠르고 각박하다. 옷의 생의 주기는 점점 짧아져서, 한 번 산 옷은 평균 일곱 번 입고 버려진다는 통계가 있다. (미국 'CBS'의 취재에 따르면 지난 30년 동안 미국인이 구매하는 의류량은 5배 증가했지만, 각 제품별로 착용 횟수는 평균 7번에 불과하다) 새로 산 옷을 개시하는 날은 설렌다. 두 번, 세 번까지도 거울에 비친 자신을 만족스럽게 느끼며 기분 좋게 입고 나갈 것이다. 네 번째부터는 조금 지루하게 느껴진다. 일곱 째를 지나는 순간 낡고 해진 소매 끝이 눈에 들어오고, 그다음부터는 그 옷은 옷장 밖을 좀처럼 나오지 못한다. 아마도 그쯤 되면 조금 비슷하지만 포인트가 다른, 새로운 스웨터가 입장했을 거다. 패스트 패션이 트렌드를 주도하면서 옷장의 순환은 가속화되었다.
빛나는 무언가를 손에 넣으면 이내 초라하게 보이는 불쾌한 감각. 어쩌면 당연하다. 그렇게 느끼도록 구조화되어 있으므로. 김애란의 단편소설 <큐티클>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 어쩌면 오늘 내 모습이 마음에 들어서인지도 몰랐다. 이런저런 곁눈질과 시행착오 끝에 가까스로 얻게 된 취향. 안도할 만한 기준을 얻는 데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었던지... 호들갑스럽지 않게 자기주장을 하고 있는 정장. 백화점 할인매장에서 산 너무 비싸지도 않은 핸드백. 담담한 질감의 소가죽 구두. 4월 친하지 않은 친구의 결혼식에 가는 길. 책가방에 점수가 잘 나온 성적표를 담아 집으로 뛰어가는 아이처럼 나는 히죽 웃었다.
김애란의 단편소설 <큐티클>
주인공은 내친김에 네일샵까지 들렀다가 결혼식에 간다. 하지만 결혼식에서, 세련되고 과감하며 감각적이기까지 한 친구들의 차림을 보고는 자신이 의기양양하게 걸치고 온 것들이 유행이 지난 것처럼 금세 풀이 죽는다.
옷차림으로 스스로를 '그럴싸하다'고 느끼는 건 그만큼 까다로운 일이다. 각 개인의 근본적인 구매력의 차이에서 오는 차림의 격차 때문에도 그렇고, 마찬가지로 유행을 따라가기 위해선 많이, 꾸준히 소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유행의 기원을 따져보면 당연하다. 유행이라는 것은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탄생했다. 어린 나이에 왕이 된 루이 14세는 파리를 장악하고 있던 귀족들로부터 권력의 위협을 받았고, 이런 힘의 격차를 꺾기 위해 고안한 아이디어가 베르사유 궁전이었다.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베르사유 지역에, 누구나 머물고 싶은 별장에서 루이 14세는 귀족들이 따라야 하는 행동 규범들을 정했다. 여기에 더해 시즌마다 옷의 모양과 컬러를 선정해 따르도록 하고 이를 어기면 벌을 내렸다. 귀족들은 유행에 맞춰 실크와 보석을 매번 새로 샀고 매번 더 화려하고 풍성해졌다. 동시에 주머니 사정이 빈곤해졌으며 귀족 전반의 경제력이 약화되었다. 힘의 역전을 꾀한 루이 14세가 바라던 대로였다.
이러한 유행은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소비자의 생활에 깊숙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산업혁명은 인간의 생산량이 인간의 수요를 뛰어넘은 것이라 다시 말할 수 있는데, 넘쳐나는 물건을 어떻게 팔아 없앨지가 가장 큰 이슈가 되었다. 만드는 것보단 잘 파는 것. 여기에 필요한 게 디자인, 그리고 마케팅이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상품들은 다분히 계획적으로 시즌마다 조금씩 모양과 컬러를 바꾸어 가며 등장한다. 의도된 '계획적 구식화'로, 이로 인해 소비자는 시즌마다 자신이 가진 물건을 촌스럽다고 느낀다.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다.
인스타그램에서 유행하는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의 옷을 보고, 화려한 인플루언서의 포스팅에 감탄하며 게시물을 저장한다. 같은 제품을 구매해 받아보았을 때, 어딘가 어색한 느낌이 드는 건 어울리는 가방과 신발이 없기 때문이고, 다 갖추어도 모자란 느낌이 들면 액세서리가 아쉽기 때문이다. 유행에 따라가고 스스로를 '그럴듯하다'고 느끼려면 연쇄 소비가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하지만 유행하는 아이템에 민감할수록 얼마나 빠르게 유행이 지나가는지도 잘 알아차릴 수밖에 없다. 또한 동시에 개성까지 챙기고 싶은 멋쟁이라면, 새로 산 가방이 몇 달도 채 안 돼서 지하철에서, 거리에서 다른 사람들 손에도 그대로 들려 있는 걸 보고 또다시 더 세련되고 특이한, 누구나 갖고 있지 않은 무언가를 찾아야 할 것이다. 소셜미디어는 끊임없이 과잉 소비와 연쇄 소비를 부추기며 유행의 주기를 더 짧게 만들고, 소비량을 늘리는 데에 일조한다.
한 기사에 따르면 한 헌옷수출업체에 전국에서 들어오는 헌 옷이 하루에만 80톤가량이라고 한다. 의류 폐기물을 매일같이 산처럼 쌓인다. 옷 가게에서 나의 옷장으로 그리고 의류 수거함으로 옮겨진 나의 깨끗하고 철 지난 옷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의류 폐기물 가운데 70%는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등의 저개발국으로 수출되고 15%는 영구 폐기되어 3% 정도가 구제 매장으로 옮겨진다. 빈티지 러버들에 의해 운 좋게 재활용되는 경우가 1%다.
[ The Environmental Disaster that is Fuelled by Used Clothes and Fast Fashion ]
해당 영상에는 소들이 옷을 풀처럼 뜯어 먹는 충격적인 장면이 담겨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옷이 만들어지고 폐기되는 모든 과정에는 탄소 배출이 이루어진다. 또한 당연하게, 패스트패션의 인기는 탄소 배출을 가중시킨다. 옷을 한 벌 제조하는 과정에서는 화학제품, 표백제 사용으로 물이 오염된다. 방글라데시에서는 연간 2만 2000톤에 이르는 독성 폐수가 수로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 결국 이 독성 폐수는 그곳의 사람, 동물, 식물, 즉 생명을 위협한다. 또한, 폴리에스터 섬유로 만든 옷은 세탁 시 미세 플라스틱 조각이 발생한다. 한 번의 세탁으로 70만 미세섬유가 물과 함께 방출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미세 플라스틱이 수생물을 위협하는 문제의 심각성은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저렴한 가격에 옷을 소비자에게 판매하기 위해 희생되는 노동자의 인권 문제 또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저렴한 가격, 할인된 가격은 패스트패션이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다. 이를 위해 노동자의 근로시간은 길어지고, 임금은 낮아지고, 근로조건은 열악해진다.
쉽게 산 옷은 쉽게 버려진다. 쉽게 가진 것을 소중히 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고, 또 애초에 쉽게 버리도록 쉽게 살 수 있게 만들어졌다는 걸 상기하면 씁쓸한 뒷맛이 남아 영 개운치가 않다. 오늘 사서 방금 막 옷장에 들어간 옷들을 생각한다. 검은색 터틀넥 스웨터와 감색 와이드 팬츠 그리고 하늘하늘한 여름 셔츠다. 아직 깨끗하고 그럴싸하며, 그 옷을 입은 나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기분 좋다. 이번에야말로, 새로 산 옷들과 최대한 그 좋은 기분을 지속하고 싶다. 그리고 더욱 신중하고 싶다. 49,000원하는 바지를 19,000원에 살 때, 빠르게 채워지고 또 의류 수거함으로 옮겨지는 옷장을 정리할 때, 옷 가게에서 두 손 묵직하게 옷을 골라보는 사람들과 의류 수거함을 묵직하게 채우는 사람들이 겹쳐 보일 때. 한 번 더 생각하고 신중하고 싶다. 이때의 신중함은, 새것은 언제나 헌 것이 된다는 걸 알고 눈앞의 새것의 최후를 떠올려 보는 것이다.
1. <단비뉴스>, 나는 오늘 옷을 샀다, 기후 위기를 샀다, 2021.10.31, 이정민 기자
2. 유튜브, The Environmental Disaster that is Fuelled by Used Clothes and Fast Fashion / Foreign Correspondent, ABC News in-depth
3. <실버라이닝 매거진>, 패스트 패션 무엇이 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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