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제주에 머물다

치료도 계획도 없이, 눈과 마당만 있었던 날들.

by OurSlowBlooms


“제주에 눈이 오겠어?”라는 남편의 말에

...

"모르지, 올 수도 있지."

그리고 진짜로, 눈이 왔다.




인생의 앞길을 알 수 없듯이,

여행의 일정도 언제나 예측할 수 없다.

병원도, 치료도, 빽빽한 스케줄도 없이
그저 아이들과 나,


우리 가족만을 위한 시간

하나만 품고 제주로 향했다.
이번 여행만큼은 계획보다는

‘흐름’에 맡기기로 했다.
엄마로서의 감각,

그리고 흘러가는 대로 둬보는 용기.


제주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탁송해 둔 차를 찾았다.
익숙한 핸들을 잡고

낯선 풍경을 달려가며,
어쩐지 이번 여행은 ‘떠난다’기보다는

‘살러 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머물 숙소는

붉은 대문과 동백꽃이 인상적인 집이었다.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고,

마당은 앞뒤로 탁 트여 있었다.
아이들은 도착하자마자 외쳤다.
“우와, 마당이다!”


마당에 놓인 축구공 하나로도 충분했다.
아이들은 그 공간을 누비며 달렸고,
나는 조용히 짐을 풀고 저녁을 준비했다.




그렇게 첫날을 보내고 난 다음 날,
밤새 쌓인 눈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었다.


제주에서, 이렇게 많은 눈이라니.


출발 전 남편은 말했다.
“제주에 눈이 그렇게 오겠어?”


나는 가볍게 대답했다.
“모르지~ 올 수도 있지 ㅎㅎ”

그리고 나는 눈썰매를 트렁크에 넣고,

아이들 스키복 세 벌도 함께 챙겨두었다.


그다음 날 아침,

마당은 온통 하얀 세상으로 변해 있었다.

IMG_2648.HEIC 말은 없었지만, 마음은 분명 움직이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야심 차게 준비해 온 스키복을 입힌 뒤,
눈썰매를 들고 마당으로 나갔다.


건우는 눈 위를 조심스레 걸었다.
손끝으로 눈을 만져보고,
잠시 멈춰 하늘을 올려다보다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말로 다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날의 건우는 분명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다.


아이들은 마당을 자유롭게 누비고,
나는 가져온 틀으로 눈오리를 만들었다.

도시에서는 귀찮고 번거롭기만 했던 눈이

이곳에서는 순식간에 선물이 되었다.


누구의 방해도 없는,
오직 우리만의 시간이 쌓이던 마당.

여행이란 결국,

어디에 가느냐보다

어떻게 머무르느냐가 아닐까.

나는 이번 여행에서

꼭 무언가를 열심히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배웠다.




우리는 너무 계획적인 삶에 익숙해져 있었다.
하루하루를 계산하고, 앞을 예측하며,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사이
숨 쉬는 법을 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 가끔은
흘러가는 대로 두는 것도 필요하다.

마당 위에 쌓인 눈처럼,
말없이 도착해

조용히 아름다움을

남기고 가는 것들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번 겨울,
나는 나에게도, 아이들에게도
그냥 ‘머무는 연습’을 선물하고 싶었다.

방학은 그런 시간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IMG_2670.HEIC 하얀 세상 위 단단하게 눌러 찍은 기억


성장을 강요하지 않고, 빈틈을 허락하며
눈 내린 제주 어느 마당처럼
넓고 하얗게 쉬어가는 시간.


그렇게,

우리는 제주에서 잠시 멈추는 법을 배웠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충분했던 시간.

그 하얀 마당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a2d74cc6-598a-44fc-9df8-ed0438132562.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