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부르는 일은, 마음을 다시 심는 일이다.
“할아버지! 이건 이름이 뭐예요? 내 볼에 있는 털이랑 똑같네. 신기하다.”
꽃에 물을 주던 파란 물통을 내려놓았다. 나는 코밑으로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 쓰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얀 울타리 밖에서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땋고 빨간 리본을 맨 여자아이가 나를 보고 있었다. 우리 민희가 살아 있었다면, 저 아이만큼 자랐을까.
“그건 애기똥풀이란다.”
내 말이 끝나자 아이는 깔깔 웃었다. 양귀비과의 애기똥풀은 줄기를 꺾으면 노란 유액이 흐른다. 그 모습이 아기의 똥을 닮았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사람들은 그걸 ‘젖 풀’이라 부르기도 했다. 부스럼이나 습진에 좋지만, 사실 유독성 식물이다. 애기똥풀은 봄이면 노란 네 장의 꽃잎을 곱게 피운다. 이곳에서 아이들과 말을 섞기 시작한 지 벌써 1년이 흘렀다. 아이는 엄마와 손을 잡고 내 꽃밭을 지나 약수터로 향하고 있었다. 일요일 아침, 사람들은 약수를 받으러 오가며 내 화단을 구경한다. 처음엔 모두가 환영하지 않았다.
“산을 왜 파헤치냐”, “물은 왜 마구 쓰냐.”
그런 소리들이 따라다녔다. 하지만 봄이 지나고, 꽃이 만개하자 사람들은 감탄했다. 지나던 이들은 “관청에서 만든 정원인 줄 알았다”며 웃었다.
“매일 이렇게 예쁜 꽃을 보여주셔서 감사해요.”
“다 좋자고 하는 일인데요.”
그렇게 대답하며, 건네받은 음료수를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액체가 목을 타고 내려가자 이마의 땀방울이 스르르 사라졌다. 다시 애기똥풀 곁으로 갔다. 이름이 참 정겹다. 애기똥풀은 나에게 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꽃이기 때문이다.
그건 재작년 봄의 일이다. 그날도 난 민희를 뿌린 무지개 호수에 꽃을 심고 있었다. 살아 있을 적 민희는 들꽃을 무척 좋아했다. 고사리만 한 손으로 모종삽을 쥐고 “할아버지~” 부르던 목소리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날, 붉은 노을이 호수에 번지고 있을 때 뒤에서 낯선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가 여기 꽃 다 심었지? 나도 꽃 좋아해.”
목소리를 따라 돌아보니 조그만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며칠 동안 나를 지켜봤던 모양이었다. 아이의 물음에 답하지 않은 채 물통을 챙겨 급히 호수를 떠났다. 나는 민희가 떠난 이후로 어린아이가 싫어졌다. 왠지 내가 다른 아이를 마음속에 들여놓으면 하늘에 있는 민희가 질투할 것만 같아서였다. 살아 있을 적에도 민희는 내가 다른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조차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난 급히 물통과 모종삽을 챙겨 들고 호수를 급하게 빠져나왔다.
어느 날 비가 무섭게 쏟아졌다. 심어두었던 꽃들이 걱정이 되어 다시 호수를 찾았을 때, 며칠 전 그 아이가 작은 손으로 쓰러진 꽃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젖은 머리칼에서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보랏빛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꽃이 다 죽으면 울 것 같아서…”
그때도 난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다만, 내 우산을 아이 머리 위에 씌워주고는 돌아섰을 뿐이다.
그날 밤, 다시 악몽을 꿨다. 민희가 내 눈앞에서 사라지는 꿈이었다. 며칠 동안 동네에 비가 내렸고 아이도 보이지 않았다. 자주 보이던 아이가 보이지 않으니 그 아이가 은근히 기다려졌다. 그러던 어느 날 며칠 동안 보이지 않았던 아이가 울먹울먹 금방 울듯한 얼굴로 내 뒤에 서있었다.
“할아버지! 나 아팠어. 왜 할아버지는 대답을 안 해요?”
나는 조용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제야 아이의 눈가의 물방울이 사라졌다.
“할아버지! 내 이름은 지희에요. 잊으면 안 돼요!”
그날부터 우리는 우연히 만나게 되면 함께 꽃을 심기 시작했다. 지희는 꽃을 심으며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렇게 같이 종종 꽃을 심으며 지내기를 한 달 즘 했을 때 지희가 내게 불쑥 화분 하나를 건넸다.
“이거 찾느라 늦었어요. 할아버지.”
그 꽃이 바로 이 애기똥풀이었다. 그날 이후, 지희는 먼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지희를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두 달 뒤, 나도 근처에 약수터가 있는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 무지개호수에 자주 가지 못했다.
민희의 기일, 나는 오랜만에 김밥을 싸 들고 호수로 향했다. 버스 정류장 앞에서 맞는 봄 햇살은 여전히 참 따뜻했다. 호수 길가엔 작년엔 없던 꽃들이 더 피어 있었다. 모두 애기똥풀이었다. 지희가 주었던 꽃을 심어두었는데 이렇게 못 온 사이에 여기저기 더 번져나간 모양이었다.
“지희야…”
나는 숨을 고르며 호수 앞으로 걸었다. 햇빛이 물 위에서 반짝였고 애기똥풀이 만개한 곳에서 난 지희를 만난 것만 같은 따뜻한 기분이 들었다. 그 호수 근처를 조용히 걷다가 민희가 잠든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민희야, 할아버지 왔다. 좋아하던 김밥 많이 먹어라.”
손끝에 닿은 노란 애기똥풀 꽃잎 하나. 노란 꽃잎에 마음이 따뜻해져 온다.
그 마음에 이사 후에도 이 산을 가꾸며 도시 아이들에게도 그 마음을 나누고 있다. 이름을 붙인다는 건, 마음을 건네는 일의 첫걸음이다. 오늘 나는 흰 플라스틱 이름표에 썼다.
'애기똥풀'
‘봄의 들꽃’
그 앞의 땅에 조심스레 꽂았다. 그리고 안내판 하나를 세웠다.
아침 공기가 유난히 상쾌하다. 허리를 펴자, 멀리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꽃잎이 바람에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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