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째 소란
자본가는 아무 이유 없이 돈을 더 주지는 않는다.
글쓴이. 바이닐
10개월 동안 학원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다. 특별히 학원 알바를 선택한 이유는 없다. 당장 돈이 급했다. 부모님이 매달 보내주는 용돈으로 타지 생활하기에는 너무 빠듯했기 때문에 알바 공고가 뜨자마자 급하게 지원했다. 근무했던 학원은 동네 영어 학원이었다. 근무지는 당시 살던 곳과는 거리가 상당히 있었다. 알바 공고에는 분명히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근무하는 것으로 명시되어 있었지만 막상 일하기로 결정이 나니까 원장이 우선 금요일에만 근무해달라고 말을 바꿨다. 학원에서는 바로 주말 근무까지 초짜 조교에게 맡기기 불안했는지, ‘하는 거 봐서’ 나중에 주말까지 근무일수를 연장해주겠다고 했다. 뭐, 내가 어떡하겠나. 그냥 ‘알겠다’고 하고, 당분간 주 1회 근무를 하는 것으로 합의 아닌 합의를 봤다.
그게 내 첫 알바의 시작이었다. 금요일에서 주말까지 근무가 연장이 된 이후에도 정확한 근무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원장이 ‘언제 나와 달라, 몇 시까지 근무해달라’고 하면 그대로 해야만 했다. 한 마디로 일정이 굉장히 불안정했다는 뜻이다. 직전 날에 갑자기 근무해달라고 한 경우도 있었고, 근무하기로 한 날 갑자기 오지 않아도 된다고 연락 온 경우도 있었다. 불안정한 일정 덕에 주말에 약속은 제대로 잡을 수도 없었다.
학원 알바를 하면서 이런저런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특히 학원 원장 때문에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았는데, ‘이렇게 사람을 잘 부려먹어야 젊은 나이에 원장을 하나’ 싶을 정도로 일개 학원 조교에게 원하는 게 엄청 많았다. 그 당시 최저시급보다 1000원은 더 받았지만 자본가는 아무 이유 없이 돈을 더 주지는 않는다. 돈을 이만큼 주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잠깐 시간 날 때 핸드폰을 확인하는 것으로도 혼을 냈고, 이 학원에 진심을 다해서 일을 찾아 하는 모습을 보여 달라는 소리도 들었다. 그만한 대접도 안 해주면서 학원의 발전을 위해 온 힘을 다해 달라는 부탁이 참 모순적이다.
학원 조교의 주요 업무로는 채점, 단어 재시험 봐주기, 각종 문서 작업, 원비 계산 및 정리, 수업자료 제작, 레벨테스트 준비, 학부모 전화 응대 정도가 있었다. 솔직하게 다른 업무는 힘들지만 할 만했다. 가끔 재밌기도 했다. 그러나 전화 응대는 조금 달랐다. 레벨테스트나 수업일정 문의에 대한 전화는 어느 정도의 매뉴얼이 있었고 응대하기 쉬웠다. 어려웠던 건 학생이 선생님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받았다는 전화, 더 이상 등원하지 않겠다고 하는 전화, 커리큘럼에 만족하지 못하거나 학생 관리에 대한 불만 전화 등이었다. 그런 전화들을 받으면 말 그대로 진땀을 뺐다. 나에게 모든 불만을 털어놓는 학부모 앞에서 상냥하게 응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 특정 선생님에 불만을 가진다고 해서 바로 그 선생님에게 전화를 바꿔드리면 안 되고 조교로서 대답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했다. 그러나 동시에 조교이기 때문에 너무 많은 걸 대답하면 안 됐었다. 정말 어쩌라는 건지···. 아무튼 그 중간 지점을 찾기까지 반년은 걸렸던 것 같다. 이런 상황에 있어서는 알려줄 사람도, 정해진 매뉴얼도 없었으며 그냥 혼나가면서 터득했다.
식사도 알아서 하는 분위기였다. 가르치시는 선생님들이나 다른 학원 조교들과 같이 밥을 배달시켜 먹었는데, 데스크가 비어 있으면 안 되니까 아이들 수업 시간 안에 모든 선생과 조교들이 식사를 끝내야 했다. 빨리 먹고 교대해야 했던 학원 분위기 속에서 항상 10~15분 이내에 급하게 식사를 해결했다. 식사 때를 놓치면 밥을 아예 먹지 못하기 때문에 급한 마음으로 빨리 먹다가 체한 적도 많았다. 5-10시간 근무를 하면서도 쉬는 시간이나 식사시간은 따로 주어지지도 않았기에 끝나고 귀가하자마자 침대에 뻗었던 기억이 있다.
학원 데스크에는 많으면 두 명, 보통은 한 명이서 일했다. 학원 조교 업무 자체가 가르치는 것을 제외한 모든 일을 관리하는 것이다 보니 간간히 까먹거나 빠트리는 일들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원장에게 크게 혼났다. 한 번은 원장이 분점으로 넘어갔을 때(일하던 학원은 본점이었고, 원장은 본점에서의 수업이 끝나 분점으로 이동한 이후였다.) 아이들 채점도 하고 단어 재시험도 봐주느라 자습하던 한 학생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이후 그 학생의 부모님은 학원에 불만 전화를 걸었고, 죄송하다는 말만 연신 반복하며 수습하자마자 원장에게 전화로 혼났다. 그날은 정말 너무 서러웠었다. 내 몸은 한 개뿐인데 말이다. 그날 학원 마감하고 건물을 나오자마자 엉엉 울며 집에 갔다.
주요 업무를 제외하고는 가끔 학원에 비치할 간식이나 차(茶) 티백, 선생님/조교들 커피 심부름도 했고 수업자료에서 문법을 고치거나, 아이들 문법 질문을 받아 주기도 했었다. 그때는 말하지 못했지만, 참 난처했다. 심부름은 둘째 치고, 학생들 질문을 받아 달라고 시킬 거였다면 미리 말을 하고 돈을 더 지급하는 게 맞다. 그러나 근로계약서도 쓰지 않은 이 비정규직 노동자는 “이런 거 시킬 거면 돈 더 주세요.”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냥 했다.
나의 알바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왜 원장에게 따지지 않았냐고’ 묻는다. 나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는 자르고 새로 구하면 되니까,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존재니까. 어쨌든 그냥 해야 했으니까. 나는 그 질문에 “나에겐 돈을 벌어 당장 생활비를 충당하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에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답한다. 정당한 요구를 하는 것은 생각보다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알바를 그만둔 지도 이제 1년 3개월이 다 되어간다. 어쩌다 그 학원을 지나칠 때면 기분이 참 이상하다. 그 영어 학원은 다시 모집공고를 올렸을 것이고, 많은 조교들이 학원을 오고 갔을 테다.
도시의 밤은 건물과 가로등으로 빛난다. 도시가 환할수록 누군가는 더 열심히 노동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며 그들의 얼굴을, 그들의 삶을 궁금해한다.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의 이야기를 궁금해한다. 오늘 밤은 ‘각자의 기억 속에만 묻어둔 수많은 이야기’들로 이 세상이 <소란>스러워지길 바라며 잠을 청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