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보면 봄, 가까이서 보면 밤>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디저트 가게를 운영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멀리서 보면 달콤하고 예뻐 보이지만,
실제는 매일 새벽부터 이어지는 육체노동과
끊임없는 메뉴 개발로
하루하루가 조용한 눈물이었다.
초반엔 그저,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었다.
그래서 몸이 힘든지,
마음이 무너지는지도 알아채지 못했다.
내 손끝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바로 그 반응을 볼 수 있다는 것.
그게 너무 좋아 뭐가 힘든지 구별도 못했다.
블로그와 인스타에 올라온 후기를 밤마다 찾아 읽으며
그저 “세상엔 이렇게 다른 반응이 있을 수가 있구나”
하는 생각만 반복했다.
한 예시로 바질토마토 마카롱을 판매한 적이 있다.
선드라이 토마토와 바질 페스토를 넣어
만든 버터크림은
내 입맛에 너무 좋아 손님들도 좋아할 줄 알았다.
그리고 정말 좋아한 사람들도 꽤 있었다.
그런데 블로그 글 중 하나에서,
그 마카롱 단면에 바질 페스토를 보고,
곰팡이가 핀 줄 알았다는 리뷰를 읽으며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맛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 리뷰를 읽은 후,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반적인 맛을 지향할 것인지,
아니면, 내 취향의 가게를 일궈나갈 것인지
고민을 하게 되었다.
결국은 내 취향대로 나가긴 했지만.
그럼에도 감사하게도,
문을 열면 가게 제품들은 금방 품절이었다.
그러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가게가 끝난 후
후기를 뒤적이다 우연히 이런 글을 보았다.
“양을 일부러 적게 만들어서
일부러 품절 마케팅하는 것 같아요.”
당시 우리 똘똘한 아르바이트생이 2-3명 몫을
척척 해내고 있었고,
나 또한 이전보다 만드는 데 많이 익숙해져
작업 시간이 줄어
오히려 더 많은 양을 생산해 내던 때였기에,
이전보다 만드는 양이 늘었던 때라,
조금 억울한 리뷰였지만, 애써 답을 달지는 못했다.
일일이 모든 것에 반응을 한다면,
내 정신력이 더 못 버틸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또 어떤 리뷰에서는
특정 마카롱만 골라 사가는 손님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맛을 못 산다고
불만이 이어졌다.
예약 시 구매 제한을 걸어봤지만,
그 또한 불만으로 돌아왔다.
새로운 스트레스였다.
학원과 디저트 가게는 확실한 달랐다.
학원은 비록 평가는 간접적이었지만
고객이 원하는 바가 분명했던 반면에,
디저트 가게에서는 ‘
잠재 고객’의 니즈와 불만을 먼저 예측해야 했다.
모두를 만족시킨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봄, 따뜻함과 낯섦 사이에
어디쯤에서 내가 헤매느라
정신없이 허우적 댈 때였다.
가게에 있는 시간에 정신없이 전화가 울려댔다.
보통 일하는 시간을 알아서
절대 전화를 걸지 않는 엄마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10통이 넘게 찍혀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친오빠의 교통사고 소식이었다.
전후관계는 불분명하지만,
오빠는 그 사고로 인해 심각한 뇌손상을 입게 되었다.
바로 수술을 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한 상황.
다리에 힘이 풀렸다.
힘들다고 말할 힘도 안 남은 느낌이었지만,
울고 있는 엄마와 근심 어린 아빠의 얼굴이 떠올라,
앞치마를 벗어던지고 병원으로 향했다.
다행히 빠른 구급조치 및
그날 뇌수술 전담 교수님이 계셔서
바로 수술이 들어갈 수 있었다.
조카들은 이제 겨우 대학교 1학년, 고등학교 2학년.
엄마를 암으로 잃은 지 4년도 되지 않았다.
세상 모든 불행이 우리 가족에게 향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울 수조차 없었다.
연로한 부모님과 조카들을 지킬 수 있는 건,
나뿐이었으니까.
나는 무조건 희망만 말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수술이 끝나고 이번에도 2주의 시간이 주어졌다.
깨어나면 회복되지만 평생 장애를 얻을 거라 했다.
인지 장애 및 왼쪽 편마비.
재활로 어느 정도 회복은 가능하겠지만,
일상 복귀는 힘들 수 있다고 했다.
그래도, 그래도.
오빠는 깨어나야 했다.
그래야 우리 가족이 살아갈 수 있었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나는 오빠가 나 때문에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알 수 없는 자책감에,
그동안 미안했던 사람들에게 다 문자를 보냈다.
나를 내쫓았던 지난 원장에게도,
내게 심술부렸던 친구에게도,
나는 미안하고 앞으로 행복하길 바라는 문자를 보냈다.
이렇게라도 내가 마음을 착하게 먹으면,
오빠가 의식이 깨어날 거 같았다.
그 힘이었을까.
오빠는 2주 후 기적같이 정신을 회복했고,
울며 일하는 내 핸드폰엔 오빠의 이름이 또렷이 떴다.
점차 회복하는 오빠를 위해
재활전문병원을 찾고 가게, 학원, 병원을 다니며
나는 무너지는 나의 시간을
어떻게든 세우려고 노력했다.
어떤 날인가. 병실에서 이것저것 정리하는 나를 보며
오빠가 혀도 안 풀린 어눌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나 때문에. 너 안 그래도 바쁘고 힘든데.
내가 죽었으면. 오히려 나을 수도 있을 텐데.
나는 지금이라도 내가 두 발로 멀쩡히 걸을 수 있다면,
저 베란다에서 뛰어내리고 싶어.
나 이런 몸으로 살고 싶지 않아."
기어이, 세우려고 몸부림치던 나의 시간이
그 말들에 산산조각 났다.
자존심이 센 오빠라서 더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어,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말들을 골라야 하는데,
나조차 희망이 없어지는 무게의 말들이라,
나는 눈물도 마른 얼굴로 오빠를 외면하고
병실을 나와 가게로 향했다.
그때 처음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지난 1년 동안 모든 걸 손에 쥐고
다 잘하고 싶어 했다.
그것이 나의 상처를 보듬고 치유하는 길이라 믿으며,
하지만 어떤 것도 온전히 다 해내지 못해,
또 다른 불만이 쌓이던 찰나, 오빠의 사고는,
이제 내가 어느 하나에만 집중하면서,
가족을 돌보야 하는 때가 되었음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봄에 문을 연 가게는
어느새 여름을 지나 가을에 닿았고,
겨울이 오기 전, 고3 학생 정리가 끝나자,
나는 학원을 넘기고 가게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다행히, 오빠도 재활을 하며
어느 정도 회복이 되고 있었고,
장애에 대한 우울도 완전히는 아니지만
그래도 잘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던 그 겨울의 어느 날, 문자 하나가 왔다.
“50 상자 예약하려고요. 9구 세트요.”
눈을 비비며 숫자를 다시 봤다.
하루에 만들 수 있는 거의 최대치였다.
조심스레 전화를 걸었다.
“혹시 예약 수량이 맞으실까요?”
상대방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아, 제가 부탁받은 거예요.”
“…네?”
“동네 맘카페에 제가 사러 간다고 올렸거든요.
혹시 살 사람 있냐고요. 근데 댓글이 막 달려서요.
사장님, 잘 부탁드려요.”
정신이 아득해졌다.
지인의 도움으로 그 맘카페에 가입했다.
정말로 “마카롱 사러 갑니다 셔틀 타실 분”이란 글에
댓글이 줄줄이 달려 있었다.
그걸 ‘셔틀’이라 부른다는 것도 그날 처음 알았다.
감사해야 할까.
무언가 찝찝한 마음이 들어 어안이 벙벙했다.
그런데, 가격이 이상했다.
내가 파는 가격보다 더 비싸게 팔고 있었다.
그 셔틀을 자처한 손님은 대량 구매를 이유로
이미 서비스도 요구했었다.
“50 상자 사니까, 머랭쿠키는 그냥 서비스로 주실 수 있나요?”
그 글을 본 뒤로 기분이 가라앉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내가 파는 건 사람이 먹는 음식이었다.
냉장 보관이 필요한, 버터와 유제품이 든 디저트였다.
어떻게 전달되는지도 모른 채,
내 이름으로 누군가에게 팔리는 것은
도무지 감당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내가 직접 배달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머랭을 치며, 꼬끄를 짜며, 속재료를 조리하며
내 머릿속엔 온통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어떻게 이 셔틀을 막지?'
그러다 어느 날,
배송 온 컬리 박스를 뜯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나도 냉동 포장해서 보내면 되잖아.'
정말 만화처럼, 머리 위 전구가 켜지는 기분이었다.
오프라인 가게는 수요일부터 토요일까지만 여니까
배송은 월요일과 화요일에 하면 될 것 같았다.
그 길로 네이버 스토어에 입점 신청을 하고
인스타그램에 공지를 올렸다.
이제, 겨우 팔로워 몇백 명뿐이던 내 계정에
공지글을 올렸다.
“멀리서도 나의 봄 마카롱을 드실 수 있어요.”
나는 몰랐다.
그 문장 하나가 얼마나 큰 파도를 몰고 올지.
따뜻하게 시작했던 19년의 봄이
오빠의 사고로 얼룩덜룩 무성한 여름도 건너뛰고,
가을로 넘어서더니,
그 겨울, 나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다음의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만, 누군가의 마음에 닿을 작고 단단한 봄들을
굽고 싶어 시작한 나의 봄은
그렇게, 제2막을 맞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