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출이와 절친이었다.
| 시기가 좋지 않았다.
| 생각도 없던 결혼을 했다.
정신없는 미국 생활이었다. 매일이 살아남기 위한 전쟁이었다. 그냥 늘 줄만 알았던 영어 실력은 좀체 늘지 않았고 나를 상대하는 미국인들에겐 본의 아니게 고구마를 먹이는 나날이었다. 하루는 호박 고구마, 하루는 밤 고구마. 다양한 답답함을 맛보게 하며 근근이 지냈다. 돈 따위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살아남아야 했으므로.
| 반복된 출산을 감행했다.
그 이후로, 돈은 내 것이 된 적이 없다. 결혼과 출산, 출산, 출산, 출산. 잘 못쓴 거 아니다. 어떤 연유였는지 가물거리는 이유로 우리는 덮어놓고 낳기 시작했다. 덕분에 아내의 배는 7년간 불러 있었고 우리의 시간은 그 기간 멈춰있었다. 매일 반복되는 우유 먹이기와 기저귀 갈기, 이유식 먹이기는 마치 시간이 멈춰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시간의 흐름은 멈췄지만 지출의 흐름은 멈추지 않았다. 아내와 네 아이의 지극히 단출한 생활만으로도 은행은 +(플러스) 계좌를 용납하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국가에서 상을 줘야 한다는 데 금전적인 면만 보면 어째 혼이 나고 있는 느낌이다. 내가 무엇을 그리도 잘못하였나.... 덮어 놓고 낳다 보면 거지 꼴을 못 면한다던 옛 공익 문구가 왜 지금에야 떠오르는 건가....
| 모든 게 핑계일 뿐,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자. 지금 내게 돈이 없는 이유를 찾아보았다. 이제 대책을 생각해보자. 회사를 바꾼다? 나는 여전히 신입사원의 능력밖에 없다. 마흔 줄의 신입사원?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 대출을 없앤다? 안된다. 그때보다 더 끈끈해져 버렸다. 이젠 대출이가 없으면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이미 내 인생의 근간을 차지해 버렸다. 결혼을 취소한다? 뭔가 출산까지 취소될 것 같은 느낌이지만 아내 손에 내 명도 취소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것도 아닌 것 같다.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난 어쩔 수 없이 돈을 모으지 못했고 별 수 없이 이대로 지내야 한다. 합리화도 빠르고 포기도 빠른 나. 살면서 가능 잘하게 된 것 중 하나가 '인정'하는 게 돼 버린 듯해 씁쓸하지만, 이내 마음은 편해진다. 나란 인간. 참...
하지만 이 과정에서 하나 확실하게 '인정'하게 된 것이 있다. 소기의 성과라고 해야 할지 또 다른 합리화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너무 명확해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Fact를 찾아 버렸다. 나는 그간 정말 처절하게 돈을 갈구했던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없으면 어쩔 수 없지. 뭐.
항상 돈이 필요했고 돈 만들 궁리를 했지만 가계부를 쓰거나 만원 단위의 재정상태를 점검했던 적이 없다. 교통비가 아까워 환승을 위해 달렸지만 매일 나 다니며 지인들과의 술자리에 빠지지 않았고 지금은 끊었지만 예쁜 연기를 보고 싶어 담배도 주기적으로 사서 폈다. 김밥천국의 모든 메뉴를 좋아했고 그런 외식도 즐거워하는 여인과 결혼했다. 그리 크지 않은 집이 아이들로 북적대는 막연한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버리고, 돈을 더 벌어보려 이것저것 하면서도 그를 통해 번 것들은 좋다고 썼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즐거워했고 돈이 궁하면 그냥 반만 즐겼다.
결국, 나는 돈이 없어 불평하고 돈의 뒤꽁무니를 쫓으면서도 그리 매달리는 사람이 아니었던 거다. 지금도 안방을 제외하곤 은행 소유인 집에서 여전히 제로에 수렴하는 통장을 들여다보며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 보면, 하늘 높은지 모르고 치솟는 서울 집값을 보며 부럽기보단 지방은 싸서 다행이라고 안도하는 걸 보면, 나름 나를 제대로 분석한 것 같다. 결국 나는 돈이 없을만한 사람이었던 거다.
그냥저냥 살아가는데 그리 많은 돈이 필요하진 않았다. 삶의 수준이 높지 않은 탓도 있지만 경험에 비춰보면 남과 비교하거나 갖지 못한 것에 대해 고민할 때나 돈이 아쉬웠다. 여전히 돈을 더 벌려고 노력은 한다. 하지만 김밥을 앞에 두고도 환하게 웃어 주는 사람을 보며 고급 레스토랑에 데리고 가지 못해 속상해하는 일은 더 이상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확실히 나는 운이 좋다. 돈이 없어도 나를 좋아해 준 많은 이들 덕분에 이렇게 우격다짐으로라도 평안을 얻을 수 있으니 말이다.
잠깐.
혹시 내게 돈이 없는 이유가 이 좋은 사람들 때문인가?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다고 하더니. 아... 아무래도 이번 생에 돈으로 부자가 돼보긴 확실히 그른 것 같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