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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햔햔 Nov 09. 2020

오마이뉴스 편집자의 쪽지에 나는 이럴 수 밖에 없었다.

작은 관심이 마흔이에게 끼치는 영향

오마이뉴스에서 메일이 왔다. 이전에도 기사에 대한 피드백을 남겨 주셨던 에디터분이 쪽지를 보냈다는 알림메일이다.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 쓴 글인데 아직도 많이 부족한가 보다. 이번 글은 어디를 다듬어야 할까 생각하며 쪽지를 여는데, 두근. 예상과 달리 쪽지는 다른 말을 전하고 있다.    



이번 기사 정말 좋네요. ㅋㅋㅋ (중략)
너무 공감하며 읽어서, 쪽지 남겼습니다. 또 뵐게요.


감정이 격하게 요동친다. 정말 좋네요. 또 뵐게요. 정말 좋네요. 또 뵐게요. 정말 좋네요. 또 뵐게요...


기쁨이 온몸에 도포되는 기분. 행복하다. 또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니. “(칭찬 받아) 정말 좋네요. (글 써서) 또 뵐게요.”라는 말이 벌어진 입에서 나도 몰래 흘러나온다. 그리고. 이렇게 또 쓰고 있다.


해도 해도 어려운 것


 새로운 것, 익숙하지 않은 것은 두렵다. 쉬이 위축되고 의구심이 들게 한다. 회사생활이 그렇고 결혼이 그러하며 육아는 말할 필요도 없다. 이제는 좀 적응됐나 싶다가도 “까꿍”하고 출몰하는 새로움에 움찔한다. 쉬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불혹의 나이에도 크게 달라진 건 없다. 여전히 실수는 잦고 티격태격하며 우왕좌왕 중이다.


이런 난해한 생활에 난수를 하나 더 추가했으니, 바로 글쓰기다. 녹록치 않은 상황에서도 제법 난해한 글들이 꾸역꾸역 나오고 있는 중이다. 난해해서 그런지 쓴 내가 봐도 새롭고, 새로워서 그런지 역시나 위축되고 의구심이 솟아난다.


새로움과 의구심의 수준에서 보면 글쓰기도 다른 생활 못지않다. 매번 백지로부터 시작하는 글쓰기는 글이 쌓여가도 새롭기만 하다. 하얀 화면을 멍하니 보고 있노라면 ‘오만’ 생각이 다 드는데 손은 ‘일’도 움직이지 않는다. 생각과 몸의 간극이 심각하다.


뭘 적을까. 끼적여 놓았던 노트도 여기저기 붙어있는 포스트잇 메모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전날 생각했던 이야기도 막상 쓰려고 하면 뭐부터 쓸지, 어떻게 풀어나갈지 도통 감이 오지 않는다. 그렇게 한동안은 배터리 방전을 알리는 듯, 불안하게 깜빡이는 커서를 넋 놓고 바라봐야 한다.


그러다, 에라 모르겠다고 내지르기 시작하면 아무말대잔치가 펼쳐진다. 오만가지 생각을 밀어 내는데 손놀림의 한계로 병목현상이 심하다. 출근길 2호선 마냥 질서 없는 생각들이 겨우 겨우 백지로 빠져 나오면, 당연히 순서는 없고 어디다 떨어뜨렸는지 철자도 하나 둘 빠져있다. 몰골이 말이 아니다.


그래도 어렵사리 정신을 수습하고 나면 눈앞에 삶의 한 부분이 놓여있다. 화사했던 한 때가 그려져 있기도 하고 찌질한 내가 울고 있기도 한다. 되도록 무겁지 않은 이야기를 쓰려고 하지만 뜻대로 되진 않는다. 글은 아래로 달릴수록 무거워지고 뱉어낸 글의 무게에 이끌려 결국 속이 딸려 나온다. 낱낱이 드러난 속이 부담스러워 다시 집어넣고 내놓기를 반복하지만, 종국엔 속이 빈다. 후련하면서도 아쉽고 담담해지면서도 걱정스럽다. 몹쓸 마음. 글도 빈약한데 마음도 갈대다. 글 쓰는 것이 이래저래 어려운 이유다.


여차저차 글을 완성해도 어려움은 끝나지 않는다. 쓴 글이 영 모자라 보인다. 하루를 꼬박 써도 10분 만에 쓴 글 같다. 투입한 시간과 글의 질이 비례하지 않는다. 거기다 원고가 채택되지 않거나 조회수가 미미할 때면, 괜히 어깨가 말려들고 고개가 숙여진다. 불판 위의 오징어가 따로 없다.


공학도의 입장에서 보면, 백번양보해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이것이다. 어느 정도는 투입한 시간에 비례해 양질의 글이 나와야 하는데, 글쓰기에선 이 공식이 무참히 깨진다. 도통 계산이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에잇! 절필은 뭣하니까 더 절실해야 하나?


힘이 되는 관심


이럴 때 필요한 것이 관심이다. 누군가의 관심은 쉬이 시작하지 못하거나 걱정하고 힘이 빠진 이들에게 살며시 등을 밀어주는 따뜻한 손이 된다. 에디터분의 쪽지만 해도 그렇다.

“ ~~~ 또 뵐게요.”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해주시니 또 뵐 수밖에. 이 말에 어찌 다시 쓰지 않을 수 있겠나. 비록 모자란 모습이더라도 자꾸 빼곰거리고 싶어진다.


예측이 불가하기에 힘든 이 행위를 계속 해나가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불확실함 때문이다. 어떤 날은 글을 쓰는 내내 스스로 위로받고, 어떤 땐 작은 댓글에 큰 위안과 격려도 받는다. 그 랜덤박스 같은 매력을 헤어 나올 수가 없다. 중독성이 제법이다.


이제는 원고의 채택여부나 조회수에 연연하지 않으려 한다. 물론 내 마음이 온전히 내 것이 아니라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고마운 분들의 달달한 댓글을 자주 맛보고 쪽지에 포장된 선물도 꽤나 자주 열어볼 생각이다. 그렇게 헛헛해지는 마음을 채우고 머릿속 2호선 지하철을 잘 운행해볼 요량이다.


위축된 마음에 공기를 불어 넣고 말린 어깨를 펴주었던 에디터분의 성원에 이렇게 또 글 하나를 쓰게 됐다. 너무나 고맙고 여전히 어떻게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글을 쓰는 것이 성원에 대한 답이라 믿으며 이 글이 그 마음에 대한 소박한 답례가 될 수 있길 바라본다.


여전히 감개무량한 댓글과 쪽지를 들여다보며 그날의 기운을 가져다 쓴다. 줄지도 변하지도 않는 선한 기운이 다시 온몸에 퍼지며 손가락 끝이 간질거린다. 이쯤 되면 안 쓸 수가 없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정성스레 건네진 격려와 칭찬이 또 이렇게 중년의 어설픈 춤사위를 부추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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