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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햔햔 Oct 25. 2021

67세 어머니가 예쁜 잠옷을 입고 주무시는 이유

걱정의 또 다른 이름

어머니는 걱정이 많은 분이다. 전쟁이 날 것을 대비해 라면과 테이프, 초 등을 가방에 넣어 두고 언제라도 들고나갈 수 있게 준비해두는가 하면, 혹시 가족이 흩어져 연락이 안 될지도 모르니 토요일 11시에서 1시 사이에는 진주성에서 기다리기로 하자는 약속까지 맺어 놓았다.


어떤 문이든 잠그고 나면 일곱 번을 확인하고, 가던 길을 돌려 가스 밸브를 다시 점검하는 것은 예삿일. 당신의 기쁜 마음이 혹여 나쁜 일을 부를까 좋은 일에도 걱정을 곁들이는 어머니는 걱정을 삶의 초석으로 삶고 계신 분이다.

어머니의 걱정은 팔자가 아닐까?


그러지 않아도 걱정이 차고 넘치던 어머니에게 더 큰 걱정이 생긴 것은 손주가 기고부터였다. 지금은 좀 뜸해졌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아이들이 병원 신세를 지니, 집에 남겨진 아이들을 위해 한 달에 두세 번은 아이들을 돌보거나 손을 보태기위해 집으로 출장을 나오셨다.


아마도 그때부터 어머니는 365일 준비 태세를 취하고 계신 듯하다. 언제든 출동할 수 있게 간단한 옷과 용품을 챙겨 방 한구석에 놓아두고, 누군가의 응급실행이나 입원 소식을 접하면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오셨다.


우리 집 네 아이들의 병치레가 줄어들자 누님의 출산(연년생)이 이어졌고 어머니는 말년 병장도 울고 갈 정도로 재빠르고 정확하게 비상태세에 대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항시 대비하고 있는 베테랑.


그럼에도 어머니는 매 순간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한밤중에 울리는 전화벨에 가슴이 철렁하고 만다. 아무리 반복되어도 적응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 내 새끼들에 대한 걱정 때문이다.


가늠하기 어려운 어머니의 걱정 임계치는 무한대가 아닐까 싶다. 누나네 아이들도 어느새 크고 조금씩 수월해지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딸과 며느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대상포진이 재발한 딸과 빈맥 증상이 생긴 며느리는 어머니에게 1+1의 걱정을 더해 드렸고, 그 덕에 어머니는 보호자를 동반해야 하는 연세에도 보호자로서 병원을 다니고 있다.


이제 우리가 잘할 테니 걱정 말라며, 전시에 준하는 준비태세를 풀어도 된다고 얘기하지만, 가끔가다 터지는 사건에 걱정이 팔자인 어머니는 한사코 그래야 마음이 편하다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내신다.


그러다 한 날,  무슨 얘기 중에 '걱정도 팔자'의 끄트머리를 발견했다.


잘라고 눕다가... 잠옷이랑 속옷까지 갈아입었다 아이가.
그냥 죽으면 끝이지 싶다가도, 그래도 예쁘게 보여야지 싶어서....


이집 저집 일로 몸이 너무 아팠던 밤, ‘낡은 옷 입고 죽으면 안돼 보일까 봐, 예쁜 옷 입고 잤다.‘는 어머니. 그리고 이후로 쭉 신경 쓰고 있노라 어머니는 담담히 말했다. 아, 어머니여. 그대는 진정...(할말못잇)

'걱정'의 끄트머리엔 '다행'이 있었다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며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그러니까 책 몇 권 읽곤 마치 삶을 통달한 듯이 일장연설을 했던 나는 번데기 앞에서 잡았던 주름이 얼마나 밋밋한지 알게 됐다.


나는 그 밋밋한 주름 사이로 흘러내릴 뻔한 눈물을 집어삼키고 감탄을 토해냈다. 걱정이 많은 분인 줄만 알았지 걱정 뒤엔 언제나 대비를 하고 계셨다는 것을 보면서도 생각지 못했다. 어머니의 걱정들은 알 수 없는 인생을 위한, 일종의 대비 목록인 셈이었다.


걱정을 걱정으로만 남겨두지 않고 뭐라도 해보려 애쓰는 모습이 이제는 전전긍긍이 아니라 초연해 보였다. 비록 그 초연함이 갈팡질팡하고 분주해 보이지만, 그 불필요한 듯한 부지런한 모습을 이전보다 편안하게 바라볼 수도 있게 됐다. 겁 많은 어린애 같은 줄 알았던 어머니는 노련한 어른이었고 걱정을 안 할 수 있다 장담했던 나는 어머니를 걱정‘만’하는 미숙한 어린애였다.


66세에 죽는다는 점쟁이의 예언이 이뤄지지 않았다며,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살아 있네!' 하고 다행스러워한다는 어머니. 67세의 어머니는 ‘살아 있어 다행인’ 오늘도 팔자에 있을 법한 온갖 걱정을 하고 계신다. 걱정 좀 적당히 하시라 말뿐인 당부를 하고 있지만, 이제는 부디 그 걱정이 오래오래 계속되길 바랄 뿐이다.


그나저나 그 점쟁이가 66세를 넘기면 오래 산다고 했다는데, 그 엉터리 점쟁이의 빠져나갈 구멍이 훗날 아주 용한 점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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