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을 기후위기라는 레이어 위에서 생각해야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기후위기라는 문제가 우리 삶/문명의 기반을 얼마나 뒤흔들 것인지 알기 어려운 지금, 지속가능한 삶과 사회라는 꿈을 앞으로 얼마나 더 유지할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이 현재의 자원분배 체계를, 원칙을, 우선순위를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지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기후위기 시대에 어떤 사회안전망을 만들어야 할 것이며, 그 과정에 기본소득은 어떤 영향 혹은 영감을 줄 수 있을까?
1월 11일, BIYN 동료들과 함께 기획한 <기후위기 시대의 기본소득 운동>이라는 워크샵에서 백희원 회원이 소개한 기후위기 대응 원칙 중 ‘정의'에 관한 부분이 눈에 띄었다. 기후위기를 초래한 원인과 사회불평등을 초래한 원인이 본질적으로 뿌리가 같기 때문이다. 대기업과 재벌 중심의 탄소기반경제, 부동산 소유자들과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건설/토건업체, 남성가부장 중심의 이성애 정상가족주의에 기반해 여성들에게 편중된 무임금의 사회적 재생산 노동, 소수 엘리트 전문가 및 공무원과 공모하는 관료제와 무한한 경제성장 신화를 떠받드는 생산지표로서 GDP. 끝으로 이 모든 부조리와 불합리를 현상유지시키는 권력 독점형 기득권 정치까지. 따라서 정의로운 기후위기 대응의 원칙과 목표는 해방적 기본소득 도입의 원칙과 목표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다음 세 가지를 제시하고 싶다.
첫째, 기후위기 대응 및 기본소득 도입의 재원마련 방향이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고 자원 재분배에 기여할 것. 기후정의, 사회정의란 말은 “누구도 남겨두지 않는다 No One Left Behind”라는 구호로 바꿔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연적, 사회적 재난 상황에 더욱 취약한 이들이 누구인지 살펴보고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재산이 적고, 신체의 활용이 자유롭지 않고, 언어가 통하지 않고, 평소 차별과 혐오의 시선으로부터 억압받던 이들이 급변하는 위기 상황에서 사회의 바깥으로 내몰리지 않도록 하겠다는 사회의 약속과 실천 방안이 절실하다.
둘째, 의사결정 과정이 민주적일 것.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논의에 참여하고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과정을 설계할 것. 청(소)년들, 여성과 소수자들, 장애인, 이주민 등 권력으로부터 소외되고 배제되어왔던 이들의 목소리를 담아낼 것. 선거권, 피선거권이 없지만 엄연히 이 땅에 함께 살아가고 있으며, 앞으로 태어날 모든 생명체를 인지하고 정치적인 결정을 내리는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이를 위한 다양한 장치도 필요하다. 최근 만18세로 선거연령이 인하되었지만 그걸로 부족하다. 만25세인 피선거권 연령을 선거권 연령과 일치시키고, 선거연령 또한 더 인하해야 한다. 이는 투표권이 없기에 기후위기 대응에 미진한 정치권에 항의하고자 학교에 빠진다는 학생들의 교육권을 박탈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다. 또한 여성과 소수자들의 정치적 대표성을 높이기 위한 여남동수제 혹은 여성과반제를 사회 전 영역에 시행하는 것, 다양한 가치를 대변할 수 있는 정당들이 국회를 구성할 수 있도록 선거제도를 제대로 개혁하고 전면적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것(여러 연구를 통해 선거제도의 비례성과 기후위기 대응의 적극성 사이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밝혀졌다). 멸종저항의 공동 요구사항 중 하나이기도 한 무작위로 구성된 시민의회를 수시로 열어 기후위기 대응을 논의하도록 하는 것 역시 시급한 과제다.
셋째,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사고할 것. 과거 제국주의 시대, 산업화 시기, ‘먼저' 탄소예산을 대거 소비해온 국가들과 그렇지 않은 국가들 간의 책임의 문제도 국민국가체제의 현 상황에서 국가주의적으로 사고하게 만든다. 대기와 해류는 국경을 마음대로 넘어다니며 기후변화를 가속화하는데 인간은 자꾸 선을 그어왔다. 이미 존재하는 국경선을 없는 취급하자는 게 아니고, 해결책을 함께 모색해야 한다는 뜻이다. 기후위기 대응은 먼저 방법을 찾아낸 ‘선진국'이 따로 있어 그를 따라가면 되는 문제가 아니다. 지구상의 모두에게 안 가본 길이자 인류가 맞닥뜨린 공동의 문제다. 물론 그것이 모두가 같은 책임을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기후정의'의 관점에서 계속 질문하면서, 세계 곳곳 토착민들의 싸움에 연대하면서 제대로 지목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기본소득 도입 또한 마찬가지다. 자본은 오래전부터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며 자원을 한 방향으로 이동시키며, 전세계적 부의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토착민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삶의 터전을 파괴해왔다. 그러나 그에 대항하는 담론과 제도는 여전히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고 있다. 전지구적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일까? 그러기엔 답해야 할 세부 질문들이 상당하다. 국민국가 내의 기본소득 도입도 쉽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어느 한 국가에서 뚜렷한 답을 알고 있는 게 아니기에 파일럿 프로젝트를 포함한 여러 시도와 실험의 과정 및 결과를 공유하며 서로에게 배우는 중이다. 20세기 후반 석유 경제에 기반한 재원으로 만들어진 북반구 복지국가들의 제도를 오늘날 남반구의 국가들이 본뜰 수 있을까? 정규직 고용을 중심으로 한 사회 안전망을 만들 수 있을까? 남아공에서의 현금지급 사례를 분석한 인류학자 제임스 퍼거슨의 책 <분배정치의 시대(원제:Give a Man a Fish)>에서 제안하듯 다른 분배정치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이제 보다 구체적으로 기본소득과 기후위기를 연결하여 생각해보자.
기존의 자본주의-복지국가 체제가 주요하게 성찰하고 해결해야할 과제는 기후변화를 포함해 축적되고 있는 생태위기의 측면이다. 사회학자 사스키아 사센은 사회적 배제보다 훨씬 적극적인 개념으로서 오늘날 전지구적으로 작동하는 "축출”의 논리를 설명한다. 경제적 불평등은 축출의 한 형태로서 “빈곤층이나 서민층에게 삶의 공간으로부터의 퇴출"을 의미하며 내전이나 자연재해, 토지 수탈로 인한 축출 역시 폭넓게 제시된다. 한편 축출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우리가 관심을 갖고 들여다봐도 알아차리기 어려운 제도권의 변두리에서부터 자연자원의 축출이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를 시정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가 필요하다. 피터 반스는 <시민배당>에서 미국에서 부의 양극화가 심화된 구조를 파이프라인에 비유해 설명한다. 축출이라는 말만 쓰지 않았을 뿐 어딘가에 한 번 꽂아둔 파이프는 빨대처럼 부의 극단적 편중을 강화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그러므로 자원 분배를 위한 다른 파이프라인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시민배당을 그 방법론으로 소개한다. 분배할 자원은 땅, 지하수, 맑은 공기, 광물 자원, 주파수 등 이미 충분하다는 것이며 이 방법 자체가 공유자원의 상품화, 시장화를 막고 지속가능하게 보존할 수 있는 장치가 될 거라는 주장이다.
기후변화를 막고, 재생에너지에 기반한 시스템으로의 전환을 견인해낼 수 있는 방안으로 탄소세 혹은 기후부담금, 생태부담금을 시민배당으로 나눠주는 것이 감세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연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미 캐나다의 브리티시 콜롬비아 주에서는 2008년부터 온실가스 배출에 대해 탄소세를 걷어서 그 중 일부를 탄소배당으로 지급하고 있다. 1년에 100달러 정도(저소득층의 경우에는 100달러 추가 지급)의 작은 규모이지만, 생태부담금-시민배당 지급을 현실화하고 있는 사례다. 녹색당도 20대 총선 공약에서 핵발전과 석탄화력 발전의 원료인 핵연료봉과 유연탄 수입에 대한 과세를 생태세로 이름 붙이며 이를 통한 기본소득 재원 마련을 얘기했지만, 앞으로 온실가스 배출에 대한 규제적 과세 또한 더욱 강조해야 할 것이다.
한편, 솔루션을 넘어 새로운 삶의 윤리를 촉진하는 관점으로서 기본소득을 봤을 때 무엇이 가능할지 상상해보았다. 특히 기본소득은 다른 사회제도의 대안보다 유독 ‘시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한다.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를 인지함으로서 그것이 내가 ‘시간'을 감각함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돌아보았다.
기본소득의 정의에는 평생, 매달 정기적으로 준다는 원칙이 포함돼있다. ‘정기성’은 ‘무조건성', ‘보편성'과 함께 기본소득을 구성하는 중요한 가치다. 이런 시간틀이 제시됨으로써 인간의 자율적인 생애를 내다보게 한다. 생애주기별 규범을 강요하지 않는다. 삶에서 어느때 무엇을 배울지, 언제 어떤 일을 할지, 언제 어디에서 얼마나 쉴지, 언제 혼자 살고, 언제 누구와 함께 살지 가장 많이 고민하고 시도해봐야 할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 된다.
또한 기본소득은 ‘시차 없는 분배’를 주장한다. 한국의 국민연금 체계처럼 현재의 기여분을 다행히 죽지 않고 살아남아 나중에 어느 나이를 지나야만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기본소득은 국민연금처럼 기여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보장제도와 다른 원리, 별개의 필요를 지니며, 모든 사람의 권리이기에 미래에 대한 투자 개념도 아니다. 준비의 시간을 거쳐 언젠가 일자리를 얻어 납세자가 되기를 기대하며 베풀어주는 돈이 아니다. 현재의 사회구성원들이 함께 만들어낸 부를 현재의 모든 동료시민들과 일단 나누는 개념이다. 신뢰와 상생을 원리로 돌아가는 사회를 만들려면 사회 속에 살아남느라 비교와 경쟁, 우월감과 모멸감이 이미 체화된 개개인의 몸부터 바꾸어야 할지 모른다. 기본소득은 개인이 삶을 전환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시도하고 실험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
돈에 대해 걱정하고, 생각하는 시간이 줄어듦으로써 비로소 미래를 계획하거나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행동경제학 교수와 심리학 교수가 함께 쓴 <결핍의 경제학>부터 탈가정 여성 청소년들의 자립팸 기본소득 실험*, 타라 웨스트오버의 에세이 <배움의 발견>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아가 일종의 사고실험을 통해 기본소득의 도입이 인간만이 아닌 모든 생명들의 공동체를 돌볼 수 있는 시야와 시간을 갖도록 촉진할 가능성을 밝혀낸 연구도 있다(Vornholt 2020).
(*“계획을 세운다는 건, 삶에 대한 예측과 예산 집행이 가능해진다는 말이기도 하다. “돈에 얽매여 사는 삶은 돈에서 거리 두기가 불가능한 삶이다. 이러한 상황은 앨리스의 정서 상태를 압도했고 위축감을 줬다. 하지만 기본소득을 받은 이후엔 계획을 세울 수 있었고, 불안감을 덜 느끼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계획 세우기’를 통해 돈만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예측과 집행이 가능한 삶을 만나게 된 거다.” 출처: “조건없이 월 30만원 지급” 탈가정 청소년에게 미친 영향 http://www.ildaro.com/8651)
노동시간과의 관계 또한 중요하다. 돈이 곧 시간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노동 바깥의 돈은 곧 ‘삶의 시간’이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소득을 얻기 위해 몸과 마음이 망가지도록 과로할 수밖에 없는 고비용의 사회에서, 기본소득을 도입하자는 주장과 노동시간을 단축하자는 주장은 서로 만날 수밖에 없다. 나아가 노동시간이 짧아질수록 에너지 사용이 줄고, 온실가스 배출량도 감소한다는 연구들 또한 기후위기 대응과의 연결고리를 드러낸다(Nässén and Larsson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