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이스터섬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는 사람이 엄마였단 걸 알게 된 게 언제였는지, 사실 기억나지 않는다. 몇 개의 선물을 받았는지도 가물가물하지만, 또렷하게 기억나는 한 가지는 있다.
셋째가 태어나기 전이니, 여덟 살에서 아홉 살 때쯤이었던 것 같다. 24일에서 25일로 넘어가는 새벽, 잠결에 머리 위로 손을 뻗었는데 선물이 놓여 있었다. 산타할아버지가 놓고 간 거라 믿었던 시절이었기에, 흥분하며 둘째를 깨웠다. 부산스러운 우리 때문에 부모님도 일어났고 함께 선물을 풀었다. 그날, 나를 바라보던 엄마의 얼굴이 지금도 머릿속에 또렷이 남아있다.
그 시절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뉴스에 귀 기울였다.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기를 기대하며 마지막에 나오는 날씨 소식을 손꼽아 기다렸다. 크리스마스에 눈이 온다면 이보다도 특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적어도 크리스마스에 더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칠레 산티아고 공항에서 이스터섬으로 향하던 비행기 안에서 살짝 설레었다. 어린 시절 서태지 뮤직비디오에서 보던 곳을 직접 간다는 것도, 누가 세웠는지 알 수 없는 모아이 석상을 실물로 볼 수 있다는 점도 흥분된 일이었지만 무엇보다 처음 경험하게 될 따뜻한 크리스마스가 기대됐다.
이스터섬엔 버스나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이 없기에, 예약한 숙소에서 무료로 픽업을 나온다. 환대의 의미로 숙소 주인이 목에 꽃다발을 걸어주는데 신혼여행도 아니고 익숙지 않은 퍼포먼스에 쑥스러웠다.
숙소에 짐을 놓고 차를 빌리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이스터섬은 제주도의 1/11 크기밖에 안 되기에, 식당, 슈퍼 등 편의시설이라고 불릴만한 것들은 메인로드에 옹기종기 모여있다. 걸어 다녀도 불편한 게 없지만, 곳곳에 흩어져있는 모아이 석상을 보기 위해선 차가 꼭 필요했다.
한국에서 렌트할 땐 세단을 탈 것인지 SUV를 탈 것인지, 소형을 탈 것인지 중형을 탈 것인지가 고민이었는데, 이곳에선 그 모든 게 사치다. 렌트할 수 있는 차량도 많지 않을뿐더러 오토는 레어템이기에 있기만 하다면 다행인 상황이었다. 그래서 오토만 있다면 가격 따윈 상관없이 무조건 잡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운이 좋게도 처음 들어간 가게에 오토가 있었다. 계약서만 쓰고 돈만 내면 되는데, 옆 가게에 들러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옆 가게에 잠깐 다녀오는 동안 우리가 봐 둔 차를 누군가 빌려 갔다.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는데, 우린 차를 놓쳤다.
여행을 망쳐버렸다는 죄책감, 동생들에게 드는 미안함, 어떻게 든 해결책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나뿐만 아니라 동생들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기분이 좋지 않았고,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숙소로 돌아왔다. 우리 사정을 알게 된 사장님은 인당 150불을 내면 투어를 시켜주겠다고 하셨다. 몇 푼 아끼려다 더 많은 돈을 쓰게 돼버린 것 같아 짜증이 났고, 결국 기분이 태도가 되어 둘째와 싸웠다.
미친 듯 싸운 뒤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셋째의 중재 아래 화해했다. 미안하다는 말을 주고받으며 해결책을 찾은 기념으로 일몰을 보러 바다로 향했다. 바다로 가는 길, 렌트할 수 없다는 걸 뻔히 알지만, 이상하게도 다시 가게에 들르고 싶었다.
"오토 있어요?"
아까와 다른 직원이 있기에 처음인 척 물었다. 당연히 없다고 할 줄 알았는데 사무실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누군가를 데리고 나왔다. 사장인듯한 그가 예상외로 차를 빌려줄 수 있다고 했다. 단, 차가 많이 낡았기에 에어컨이 안 나올 수도 있는데 그래도 괜찮냐고 물었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기에 계약서에 서명 했다. 내일 아침 9시까지 오라는 그의 말에 기분 좋게 가게를 나왔다.
운이 좋았다는 나의 말에 둘째는 엄마의 선물이라고 대답했다. 맞는 말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이 행운이, 이곳에서 보내게 될 크리스마스에 즐거운 추억을 만들라는 엄마의 선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