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우덴
금순이와 헌자는 20대 초반 처음 만나 30년 넘게 이어져 온 친구 사이였다. 골목골목으로 이뤄진 인천의 어느 동네에서 처음 만난 그녀들은 고만고만한 삶을 살았다. 같은 해, 같은 날, 둘째를 낳았다는 공통점 때문일까 사는 곳이 달라졌어도 그녀들의 인연은 쉽게 끊기지 않았다.
자주 만날 수가 없으니 그녀들은 이삼일에 한 번꼴로 통화했다. 뭐 하고 있니로 시작해 오늘 저녁은 뭐 해 먹을 거니로 끝나는 그 시답지 않은 전화가, 어렸던 나는 이해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그때 그녀들의 나이가 되고 나니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게,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나이를 먹을수록 이해관계가 얽힌 사이는 늘었으나,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나눌 사이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여행하다 보면 처음 본 사람과 하루 이틀 함께할 때가 있다. 가끔은 마음이 맞아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친구라고 부를 만큼의 관계를 이어나가기란 힘들었다. 물론, 제시를 처음 만났을 때도 다르지 않았다.
탄자니아 세렝게티에서 만난 그녀는 사파리 투어 가이드를 꿈꾸는 독특한 네덜란드인이었다. 3박 4일을 함께하는 동안 그녀는 가이드보다 빠르게 숨어있는 동물을 찾아 우리에게 알려주곤 했다. 세렝게티에선 사자보다 코뿔소를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도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였다. 투어를 하는 내내 아프리카에 빠진 그녀가 몹시도 궁금했다.
헤어지던 날, 그녀는 우리의 일정에 네덜란드가 있는지 물었다. 네덜란드라는 나라가 매력적이지 않았지만, 그녀와 함께 하는 시간이라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녹녹지 않은 삶을 살았던 그녀와 엄마를 잃고 방황하던 우리 삼 남매는 통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4개월 만에 만난 제시는 네덜란드에서 축구로 유명한 아인트호벤[Eindhoven]에서, 약 2시간 정도 떨어진 우덴[Uden]이라는 도시에서 살고 있었다. 박물관도 미술관도 없는 한적한 그곳에서 그녀와 시답지 않은 일주일을 보냈다.
먹고, 자고, 놀고, 생산적이지 않은 시간을 보냈지만, 맛동산이 똥처럼 보여 먹기가 거북할 수도 있다는 것과 바나나킥을 한입 베어 물면 건강을 잃을 것만 같은 인공의 맛이 느껴진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온종일 제시가 없는 집에서 뒹굴뒹굴하다 겨울 동안 쓸 모자를 사러 밖으로 나왔다. 다운타운 입구에는 얼굴을 검게 칠한 사나이가 초콜릿을 나눠주고 있었다. 초콜릿을 주는 그도, 초콜릿을 받는 우리도, 서로에게 흥미가 생겨 몇 마디 주고받았고, 사진도 남겼다.
퇴근하고 돌아온 제시에게 받은 초콜릿을 주며, 그와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단순히 호객행위를 하기 위한 분장인 줄 알았는데, 그의 분장에는 예상치 못한 반전이 있었다.
네덜란드에는 12월 25일과 12월 6일, 크리스마스가 두 번 있다고 했다. 엄밀히 말해 12월 6일은 크리스마스가 아닌 [신타클로스 데이]로 크리스마스이브에 산타클로스가 선물을 주는 것처럼, 12월 5일에 신타클로스가 선물을 준다고 했다. 산타클로스와 신타클로스가 동일인이냐고 물었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No'를 외쳤다.
산타클로스에게 루돌프가 있는 것처럼, 신타클로스에겐 검은 피터라는 조력자가 있는데, 오늘 우리가 만난 사람이 조력자 피터란다. 피터의 까만 얼굴은 선물을 전해주러 굴뚝을 타고 다녀 재가 묻어서라는데, 처음 접한 세계관에 매우 혼란스러웠다.
신타클로스가 선물을 주는 그날, 우린 네덜란드를 떠나 남미로 향했다. 공항을 가기 전, 카페에 들려 우리가 마실 석 잔의 커피 외에 아메리카노 한 잔을 더 주문했다. 엄마의 기일 이기도 한 날이기에 엄마가 좋아하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테이블 위에 두고 싶었다.
5년 전 오늘, 장례식장에서 엄마의 지인들에게 부고 메시지를 보냈다. 부고 메시지를 받고 온 그들은 우리를 보며 무척이나 당황스러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는 아팠던 시간 동안 그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았기에, 그들에게 엄마의 죽음은 갑작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엄마의 30년 지기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장례식장에서 얼굴 한번 보여주지 않고 떠난 친구를 원망하다가도 불쌍해서 어떻게 하냐며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통곡했다. 수십 명의 조문객 사이에서 남겨진 우리도 아닌 홀로 된 아빠도 아닌, 오로지 엄마만을 위해 울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