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강물처럼, 우리를 낫게 해주는 시간의 힘
영화 <About Time>도 제목 그대로 시간에 관한 이야기이다.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주인공은 영화의 끝에 더 이상 시간여행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주변을 돌아보며 현재 그 자체를 만끽한다면,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그 경험들을 수정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나는 밀라논나 님의 유튜브 구독자인데, 그분의 시간들을 영상으로 보면서 감탄을 하곤 한다. 삶의 중요한 일들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려놓고 비로소 책임감으로부터 상당히 자유로워진 삶을 미리 볼 수 있어서 좋다. 넉넉히 주어진 나만의 시간들을 풍요롭게 가꿔간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일 것이다. 생각만 해도 설레고, 기대가 되기까지 한다.
배우 윤여정 님이 한 예능에서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다. 자신은 절대 젊은 시절,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겪어왔던 많은 일들을 또 해내야 하고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주요한 내용이었다. 나이가 어렸을 때, 20대와 30대를 한참 거쳐가는 어린 시절에는 저 인터뷰 내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 같으면 과거로 돌아가서 진로, 직업 등 여러 가지 더 나은 선택을 하고 자본주의에도 일찍 눈을 떠서 돈도 더 벌고 여행도 더 다니겠다, 뭐 이런 마음이었다. 특히 저 정도 나이가 되었을 때는 무슨 재미로 사나, 어차피 되돌아가지 못하니 현재 삶에 대한 합리화인가, 이런 철없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제야 뒤돌아보니 윤배우 님의 말이 이해가 되고 공감도 된다. 삶이 한여름밤의 꿈, 일장춘몽 같다는 말도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나풀나풀 날아다니는 나비처럼 예쁘게 날갯짓하던 어리고 풋풋한 시절의 장면들이 정말 꿈처럼 느껴진다. 그 시간들이 정말로 존재했던가? 그래서 가장 선명한 건 현재 나의 모습뿐이다.
다시 20대, 30대로 돌아가라면 난 절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방황의 시기와 시행착오를 거치고, 무언가를 갖고 싶어서 아등바등 열심히 노력하고, 결과를 알 수 없는 선택들을 다시 해낼 수 없을 것 같다. 다시 하기도 싫다.
또한 그 과정 속에서 느꼈던 무수한 아픔, 실망, 고통, 힘겨움, 불안, 공포, 외로움과 같은 감정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기억에서 흐릿해진다. 오히려 좋았던 추억, 기쁨, 행복했던 순간들만이 남고 과거가 미화된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이 떠오른다. 시간의 강력한 힘이다. 최면을 걸듯 잊게 해 준다. 그래야 인간이 계속 살아갈 수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어떠한 어려움도 상당 부분 시간이 해결해 준다. 시간과 자연만이 우리에게 유일한 위로를 준다.
요즘은 정말 말 그대로 절박하게 당장 주어진 시간에 집중한다. 아이 둘을 키우다 보니 1시간 이상의 시간이 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겠다. 예전 같으면 머리를 식힌다는 명목으로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보고 시간을 때웠겠지만, 이제는 무엇을 해야 이 시간을 가장 가치 있게 쓸까 고민하면서 생산적으로 보내려고 한다.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3월부터는 두 아이가 모두 유치원, 어린이집에 등원하여 중간에 시간이 나니 다행인데, 그전까지는 종일 나만의 시간이 없다는 사실이 참 스트레스였다. 아이가 잠을 잘 때 유일하게 덩어리 시간이 나는데, 그 시간에는 또 각종 할 일이 있다. 그걸 쫓기듯이 빨리 끝내고 잠시 눈이라도 붙여야 또 나머지 시간에 힘내서 아이들을 돌볼 수 있다. 30분의 '파워냅'으로 급속 에너지 충전을 한다. 간절하게 휴식을 취하고, 아슬아슬하게 할 일을 해낸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시간의 가치를 알고 시간을 제대로 운영하는 요령이 생겼다. 전처럼 과거의 감상에 젖을 틈도 없고, 머리 싸매고 고민할 시간도 없다. 감정을 낭비하게 만들고 날 흔들어 에너지를 빼앗아가는 것들은 과감하게 차단할 수 있게 되었다. 한정된 자원을 적재적소에만 분배하는 것이다. 오히려 삶이 단순 명료해지고 맺고 끊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오늘 하루를 버티면 다시 리셋이 되고 새로운 하루가 펼쳐진다는 사실이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오늘 육아가 너무 힘들고 내 인성의 바닥을 본 날에도 빨리 잠을 청하고 일어나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실수한 것들은 더 잘 해낼 수 있다. 반복되는 일들이 많기 때문에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이 매일 업그레이드된다. 직감적으로 알게 된다. 지금 무엇을 해야 옳은 것이고,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통찰력이 생긴다. 아마 이건 직업의 현장에서도 똑같이 적용될 것이다. 이 선택을 하지 않으면 뻔한 결말이 예상되기에 지금 귀찮아도 해야 할 일들을 해낸다. 영화 <Edge of Tomorrow>를 보면 이 과정이 상당히 비유적으로 이해될 것이다.
매일 그날의 해야 할 일들만 쳐내고 살아가다 보니 문득 두려움이 밀려오기도 한다. 이러다 시간이 다 흘러버리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이다. 주어진 시간의 끝에서 돌아봤을 때 내가 원하는 삶, 상상했던 삶의 모습들을 현실로 만들고 만족과 감사함을 느끼고 싶다,라는 생각이 든다. 현재 해야 할 일들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못했다는 후회가 아니라, 그걸 다 해내면서도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았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러면서 시간이 얼마나 정직한지 다시 생각해 본다.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모든 시간들은 어느새 정확한 결과가 반영된 미래의 시간으로 데려다 놓는다. 시간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 그래서 오히려 희망이 있다. 내가 허우적거리고 숨이 막히는 날에도 시간은 말없이 나를 바라보며 데이터를 차곡차곡 모으고 있다. 그리고 그 데이터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엮는다. 우리는 시간이 흘러 상상하지도 못했던, 때로는 상상해 본 적이 있던 현실에 갑자기 앉아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깨달은 것은 나 자신을 잘 알고, 내 영혼과 일치하는 일들을 하고, 현재에 집중한다면 어느새 시간이 흘러있다는 사실이다. 영원할 것 같던 힘든 시간들도, 수많은 실수와 자괴감의 나날들이었어도, 성장하고 실력이 쌓인 상태로 현재의 시간에 새롭게 도착해 있다.
과거는 왜곡되어 같은 실수를 반복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희미해져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또한 같은 방식으로 지금 한다고 해서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시간이 흘렀고, 나도 주변 사람들도 바뀌고 삶의 세팅 자체가 완전히 달라졌으며 세상도 달라졌다. 미래의 시간은 목표와 꿈들을 별처럼 띄워놓고 방향을 찾고, 큰 청사진을 그리는 정도로만 생각해야 한다. 다가오지 않은 시간에 불안감이나 공포를 느끼는 것은 현재 나를 치열하게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큰 그림으로 봤을 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좋은 결과를 내놓는 힘은 시공간을 초월한 사랑, 이루고 싶은 꿈에 대한 간절함, 갖고 싶은 것에 대한 밝은 소망 등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내서 계속될 때까지 해나가는 것이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더라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통제 밖의 상황인 것 같더라도 그 안에서 내가 작은 것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 반드시 있다. 혹은 내가 통제 가능한 영역이 반드시 있다. 그 영역에 나의 의지를 반영해 보고, 변화를 시도해 보고, 나의 가치관과 나의 색깔에 맞는 일들을 조금씩 내 힘으로 해내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톱니바퀴가 맞물려 조금씩 움직임이 퍼져나가듯이 전체적인 영역에 커다란 움직임까지 만들어낼 수 있다.
단 하나의 좁은 길이라도 진심을 다해 통과한다면 반드시 시간은 그 노력을 보상해 준다. 내가 발을 딛고 서있는 현재, 현실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과거에 대한 아쉬움과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현재 하고 있는 일을 망쳐서는 안 된다. 가장 생생하게 숨 쉬고 뚜렷하게 보이는 지금 이 시간을 온 힘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