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좋아하는 것’을 기준으로 한 선택
빨리 어딘가에 자리를 잡아야겠다는 조급함을 잠시 내려놓았다.
대신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생각해 봤다.
당시 내가 제일 좋아하던 취미는 기계식 키보드를 조립하는 것이었다.
기계식 키보드야말로 작은 취향들의 집합체이다.
하우징의 재질부터 시작해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이젠 셀 수도 없이 많아진 스위치, 취향에 따라 윤활방식도 달라지고 종류도 다른 스태빌라이저, 하우징마다 다르게 설계된 빌드 방식, 몇천 원에서 몇십만 원까지 가격도 디자인도 다양한 키캡까지 골라야 할 것도, 취향 타는 부분도 많은 영역이었다.
같은 키보드라도 어떤 선택들을 했는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과물이 된다.
기계식 키보드를 처음 시작했을 때에는 남들이 좋다는 걸 따라 했었다.
하지만 여러 키보드를 조립해 보고, 또 분해해서 다른 조합을 찾아보며 조금씩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게 되었다.
이젠 내가 정확히 좋아하는 스위치 윤활 조합이라던지, 좋아하는 촉감의 키캡의 종류라던지, 가장 좋아하는 소리를 내는 빌드 방식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친구와 이런 이야기로 논쟁을 벌이면 눈이 반짝였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함께 최적의 조합을 찾을 때까지 같은 키보드를 몇 번이고 리빌드를 하기도 했다.
이렇게 애정을 갖고 있던 취미였기에,
한 회사의 기계식 키보드 팝업 스토어에 단기 알바로 냉큼 지원을 했다.
돌이켜보면 조금 엉뚱한 선택이었다.
로스쿨을 그만두고 취업준비를 하던 사람이 갑자기 키보드를 파는 알바를 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겐 정말 이해되지 않는 흐름일 것이다. 실제로 가끔 일하다 마주친 아는 사람들은 ‘너 로스쿨 다니는 줄 알았는데?’라는 질문을 꼭 했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드디어 로스쿨을 탈출한 이유를 찾은 기분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자.
아르바이트는 다른 걸 다 떠나서 재미있었다.
내가 애정을 가진 물건을 다른 이들에게 소개하고, 그들도 내 취미에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안내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무척이나 뿌듯했다. 그들이 여러 키보드를 타건 해보고 신기해하면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가끔은 나와 비슷하게 이 취미를 깊이 즐기는 사람을 만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이력서에 꼼꼼히 포장된 나를 적어 내리는 일보다 훨씬 나다운 일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 그리고 그걸 좋아하는 나의 모습을 가리는 것 없이, 거짓됨 없이 드러내는 일이었기에.
누군가가 나를 평가하지도 않았고, 정답을 꼭 맞힐 필요도 없었고 애초에 정답이라는 것도 없었다.
드디어 자유를 얻은 기분이었다.
나의 그 선택이 인생의 정답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생에 정답이 어디 있는가.
나의 삶의 기준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좋아하는가’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나에게 충분히 중요한 변화였다.
이제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멋지게 나답게 살아봐야겠다는 용기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