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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Dec 30. 2023

"가장 오래갈 마음"

김금희, <식물적 낙관> 

"결국 식물을 기르면서 내가 하는 일이란 대체로 일상과 겹쳐 있다.
생각해보면 이런 것이야말로 가장 오래갈 마음이 아닐까.
준 것을 특별히 기억하지 않는 완전한 습관으로서의 돌봄,
혹은 사랑 같은 것 말이다." p83


#김금희 #식물적낙관 #문학동네 #식물산문집 #식물하는마음


2023년 8월 20일의 독서일기


폐관 시간이 되어서야 책을 반납했다. 


에세이 속 에피소드들이 저마다 이끌어낸 기억들이 있었다. 부주의와 무지로 떠나보낸 식물들, 일년여를 애썼으나 잃고만 이십년지기 내 반려식물, 화단을 갈아엎을지언정 어떤 식물도 잘 키워내는 부모님, 내가 키웠다 생각했으나 실상 나와 무관하게 생장한 것들과 그 가운데 으뜸일 아이, J가 내 세계의 중심이던 시절 내가 함께한 사람들.


저자의 말처럼 “식물에 다른 대상을 겹쳐놓는 일”은 좋지 않으며 "식물의 상태에 내 감정을 기탁하는 일은 위험하"다 느낀다. 허나 나는 변함없이 그러할 것 같다고, 엄마가 준 벤자민이 내 키를 웃자라도록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과 J가 초등학교 입학선물로 받은 고무나무를 한번도 가지치기하지 못했음을 생각했다. "부자연스럽고 맹목적인 '연연함'", 그리고 "우리가 관여할 수 있는 조건은 한정적이고 우리는 절대 살아 있는 것들의 완벽한 관장자가 될 수 없"음에 대해서도. 작년 추석 때, "언니, 내가 이런 건 과감하게 잘해," 막내가 전지가위를 들고 나서자 내가 절절맸고 결국 아버지가 사방으로 뻗은 가지들을 보기 좋게 줄로 엮어 수형을 잡아주던 일도.


흐물거리게 하는 더위가 그래도 밤이라고 한풀 꺾였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여름밤 특유의, 마음을 달뜨게 하는 기운이 있었다. 날씨의 변화가 견딜 수 있는 지점을 곧 넘어설 것만 같다. 지구의 환절기, 더 나쁜 계절로 넘어가려는 변화의 마디에 서 있고, 훗날 이 시기를 떠올리며, 그때는 그나마 나았지, 하는 날이 얼마나 빨리 오려나. 맞은편에서 개의 목줄을 느슨하게 끌고 오던 이가 일갈했다. 일절만 하라고. 그녀의 기분을 살피는지 더위에 지쳤는지 개는 풀이 죽어 보였고 발걸음이 늘어졌다. 그녀가 헛웃음을 흘리며 곁을 지나가는데 귀에 에어팟이 꽂힌 게 보였다. 등 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씨, 담배 말려. 고만해라 진짜.


눅진한 바람 한줄기가 목덜미를 훑고 지나간다. 미적지근한 대기, 집요하고도 짙게 퍼지는 매미와 풀벌레 소리.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며 축축해진 이마를 손등으로 닦아냈다. 여자애들이 재잘거리며 다가섰다. H에게서 다시 답톡이 왔다. 막내에게 책 읽어주느라 아직 안 자고 있다 했다.


정오께 H가 단톡방에 간만의 안부를 남겼다. 셋이서 돈코츠라멘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면서, 옛기억을 함께 나눌 친구들이 있어 좋다고.


얼마 전에는 내가 이와 비슷한 톡을 육아메이트였던 Y언니에게 보냈다. 어느 흐린 주말 오후 언니가 준 두툼한 해물 부침개가 뜨끈한 채로 우리집 식탁에 놓일 수 있을 만큼, 우리는 가까이 살았었다.


그런 날들을 떠올리게 한 것도 이 책이었다. 저자가 오랜 친구에게 부침개가 식지 않을 거리에서 노후를 함께하자 했던 대목을 읽다가 Y언니에게 대뜸 안부를 물었다. 내 난데없는 부침개 이야기에 언니가 ㅋㅋ 웃었다. ‘많이 그러고 살았지, 제주 귤도 많이 먹었어 내가,’ 언니가 답했다.


언니는 아직도 "J야" 하고 나를 부르고, 나는 J의 친구인 언니네 둘째 이름에 언니라는 호칭을 붙여 부른다. 관계의 중심에는 아이들이 있었다. 십여년 간, 아이들의 성장 드라마 속에서 그저 "결과의 확인자"가 아니라 "과정의 조력자"가 되고 싶어 머리 싸매며 같이 고민하던 사이였지만. '이제 얘들과는 상관없이'라는 말을 속에만 담고서 문자를 남겼다. ‘우리 오래오래 가요.’ ‘그러자, 얘들 대학 보내고 재미나게.’


폰을 가방에 도로 넣곤 여자애들을 곁눈질했다. 나이가 가늠되질 않는다. 낡은 옛 사진 같은 시간들이 뇌리에 남아 있다. 나이 들수록 원체험에 가까운 기억이 선명해진다는 말도 이 책에서 읽은 것 같다. 그 시절에 대한 향수는 없지만... 머리를 늘어뜨린 여자애가 속살대며 눈을 휘며 웃자 나를 등지고 선 애가 팔꿈치로 그 애의 옆구리를 툭 찌른다. 하지만, 그 시절만이 품은 생기, 무엇에도 훼손되지 않았으며 오늘을 살면서도 미래의 빛을 향해 뻗는 마음, 생의 모든 가능성이 두 팔 활짝 벌려 환영하는 것만 같았던 시절의 낙관이 그립기는 하다.


식물적 낙관을 형상화한 듯한 아이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길 건너편 중년의 여자가 지친 얼굴로 목덜미를 주물러댄다. 내 얼굴도 그녀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녹색불이 반짝 켜졌다. 대각선 횡단보도를 교차한 이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생이 들끓는 이 시절이 끝나지 않았으면, 더위와 소음으로 가득찬 계절의 정체 속에 괴로이 머물더라도 시간이 아주 더디 가면 좋겠다.


식물에게는 지금 이곳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엄정한 상태가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역설적으로 식물들의 낙관적 미래를 만들어낸다. 환경에 적응하는 것, 성장할 수 있다면 환희에 차 뿌리를 박차고 오르는 것, 자기 결실에 관한 희비나 낙담이 없는 것, 삶 이외의 선택지가 없는 것, 그렇게 자기가 놓인 세계와 조응해나가는 것. 이런 질서가 있는 내일이라면 낙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오는 말-우리가 선택한 낙관> 중에서, p257


 "헤세는(...)한가지만은 늘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는데 바로 "아름답게 사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가장 무상한 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충고한다."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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