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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May 20. 2024

스완 씨의 매우 특별한 사랑 이야기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

풍부한 문화소양과 재치 넘치는 언사로 사교계의 총아였던 부유한 유대인 스완 씨의 망한 연애사


날씨앱을 열어보곤 투덜대는데 남편이 피식 웃으며 내 말을 고쳐줬다. "강수량이 아니라 강수확률 70%이겠지." 아, 내가 또... 이마를 짚고 탄식했다. 며칠 전 남편의 말실수를 갖고 아, 뭐야 ㅋㅋㅋ 웃어댔는데... 


요즘 우리 일상에 새로 자리잡은 루틴은 야밤 운동(이라 쓰고 산책이라 읽자). 대략 오천보에서 만보 사이를 걷는 중에 빠지지 않는 대화는 이런 것이다. "이름 뭐더라? 왜 그 사람 있잖아, 그 천만영화에 조연으로 나왔던..." "어어, 알아 알아." 영화도 조연도 한둘이 아닌데, 대명사 투성이의 대화가 별 탈 없이 이어진다. 맥락상 가능한 일이겠지만, 실은 함께 수다 떨며 보낸 세월의 힘, 그 시간 동안 공유한 경험들 덕이라 생각한다. 대충 얼버무려도 때론 헛소리해도 용케 알아듣는다. 


여하튼 동갑내기 부부라 언어(특히 명사)누실도 비슷하게 일어나는데, 며칠 전에는 소설 제목이 떠오르지 않아 둘이 걷다 말고 폰을 꺼내들었다. 아니, 서희와 길상이도 생각나는데, 도대체 왜? "박경리 토지다!" 내가 외치자 남편이 한탄했다. 자기가 얼마나 좋아했는데 그게 그렇게 생각이 안나느냐고, 제목이 어려운 것도 아닌데. 누가 누굴 위로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나는 남편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래도 나보단 낫지. 나는 최명희의 혼불을 먼저 떠올렸다.


그날 딸과 어떻게든 놀아보려는 우리 부부의 야심찬 나들이 계획은 강수확률 70%로 취소되었고, 서울은 오전부터 내렸다는 비가 여기서는 한 시가 넘어서자 내리기 시작했다. 덕분에 미루고 미루던 마르셀 프루스트의 <스완네 집 쪽으로> "스완의사랑" 편을 드디어 끝냈다. 재밌었다! 평소처럼 감상을 장황하게 남기고 싶은데, 기력이 없다. 읽느라 거의 소진했다...


지만 숙제하는 마음으로 기록해보자면... 

      



1. 2권은 진입이 힘들었다. 프루스트의 문체가 아니라 19세기 말 부르주아 계급의 연애사가 걸림돌이 될 줄은 몰랐다. 이게 사랑이야? 이것도 사랑이지... 이게 무슨! ( 하필 <패스트 라이브즈> 각본집의 강렬한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터라 더욱) 한숨과 실소가 새어나왔는데 읽다보니 쟝르가 로맨틱 코미디. 스완 씨가 사랑의 구렁텅이에 빠져 안쓰럽고 찌질하고 우스꽝스러운 면모를 본격적으로 보여주면서부터 독서가 유쾌해졌다. 그의 회한 넘치는 처절한 마지막 외침은 이 소설의 펀치라인 같달까, 웃음이 빵 터졌다. 


2. <풍부한 문화소양과 재치 넘치는 언사로 사교계의 총아였던 부유한 유대인 스완 씨의 망한 연애사>. 

(이렇게 요약하자니 납작해진 감이 없지 않지만) 유머가 돋보이는 이야기의 표피 아래 사랑의속성과 관계 역학의 본질에 관한 통찰이 깔려 있다(내 밑줄 지분 70% 차지)! 2권에서도 프루스트 특유의 관념적이지만 유려한 서술과 다채로운 군상들의 입체적인 묘사가 이야기에 깊이와 생기를 불어넣는다. 특히 당대 계급 사회 구성원(세습 귀족, 제정시대 귀족, 신흥 부르주아 계급)들간의 갈등과 알력 다툼, 스노비즘 따위가 위트있게 그려진다. 더불어 전통과 전위의 충돌이 흥미진진한 19세기 말, 벨 에포크의 분위기까지 엿볼 수 있다. (트렌드의 중심이 쇼팽에서 바그너, 드뷔시로 대체되던 당시, 쇼팽을 여전히 좋아하는 후작부인이 아방가르드적인 취향을 지닌 며느리의 눈치를 보는 장면이 나온다. ㅎ 시대에 따라 유행은 바뀌어도 유행의 세태는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게 없어보인다.)    


3. 예술애호가의 사랑은 이렇다는 걸 보여주듯이 '사랑의 생애' 그 모든 결정적 순간에 예술이 자리한다는 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화류계 여인 오데트는 스완의 눈에 들고자 애쓰지만 그의 미적 취향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마음을 얻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스완은 오데트에게서 보티첼리의 벽화 속 제포라를 떠올리는데. 그가 오데트를 '재발견'한 순간, 오데트를 '아름답게' 느끼게 되며, 비로소 그의 사랑이 시작된다. 그의 감각이 일깨워진 데는 음악도 한몫한다. "정신의 메마름" 상태에 놓여 있던 그를 감각적으로 재회생시킨 '뱅퇴유 소나타'는 한때는 그들 사랑의 정표이자 가장 행복한 시절의 상징. 아이러니하게도 몇년 뒤 이 소나타를 음악 그 자체로 온전히 감상하며 그는 사랑의 끝을 실감한다.


4. 오데트와의 관계 속에서 스완은 '고통받는 자'로 스스로 포지셔닝한 것처럼 느껴지는데, 이 또한 흥미로웠다. 그에게는 고통과 사랑이 한 몸이며, 사랑의 증거가 고통이다. 이 무슨 마조히스트의 사랑인가 싶지만;;; 이런 고통스러운 사랑으로 그는 자신을 괴롭혀 왔던 권태, "정신의 메마름"을 떨칠 수 있었고 예술에의 사랑을 회복한다. "새로운 젊음에 대한 가능성", "신비로운 쇄신", "오로지 우리 감각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세계와 접촉할 때 얻는 기쁨" 등이 고통과 한배를 탔기 때문에 그는 그를 철저하게 우롱하는 거짓된 사랑에서 자발적으로 벗어날 수 없다. 

#아무튼스불재


“하지만 그가 그렇게도 안타깝게 생각하는 마음의 안정과 평화가 사랑을 위해서는 그리 바람직한 분위기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오데트가 더 이상 그에게 있어 항상 부재하고 그리워하는 상상 속 존재가 아닐 때, 그녀에 대한 감정이 소나타 악절로 혼미해진 그 신비스러운 상태가 아니라 애정이나 감사함이 될 때, 그의 광기와 슬픔을 끝낼 정상적인 관계가 이루어질 때, 그때가 오면 오데트 삶의 모든 행동 그 자체에 흥미를 잃을지도 몰랐다. 그는 여러 번 그런 의혹을 이미 품었었다. (...) 자신이 치유되면 그때는 오데트가 하는 일에 무관심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그의 병적인 상태에서 그가 죽음만큼이나 두려워한 것은 그가 처한 모든 상황의 죽음이나 다름없는 바로 그 치유였다.” p197 


"예전에 스완은 오데트를 사랑하지 않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자주 불안에 떤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사랑이 달아나기 시작하는 것처럼 느껴지면 주의를 게을리 하지 말고 곧 사랑에 매달려 붙잡아야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사랑이 약화되면서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은 욕망도 약해지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우리 것이 아닌 과거 감정을 계속 따르며 다른 사람이 되거나 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323"      

 

5. 오데트는 도통 그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사랑이 자격을 부여한다는 이승우 작가의 문장이 떠올라 고개를 끄덕끄덕. "은총이나 구원이 그런 것처럼 사랑은 자격의 문제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사랑의 생애> p11)"    


"사랑할 만한 자격을 갖춰서가 아니라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올 때 당신은 불가피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자격을 갖추고 있어서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와서 당신에게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사랑이 들어오기 전에는 누구나 사랑할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사랑했거나 사랑하고 있는 어떤 사람도 사랑할 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어서 사랑했거나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은총이나 구원이 그런 것처럼 사랑은 자격의 문제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pp.10-11" - 이승우, <사랑의 생애>      


6.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 느낄 때, 우리가 사랑에 빠진 눈으로 바라보는 건 과연 그/녀일까. 

스완을 사랑 앞에 굴복시킨 것이 오데트 그 자체가 아니라 오데트에게 덧씌운 매혹의 이미지라면, 그의 사랑은 얼마나 진실되다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의 일면이 그러하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를 매혹시킨 이미지는 과연 그 대상에 속한 것일까, 아니면 우리 각자의 마음 깊이 키워오던 열망의 이미지일까. 사랑에 눈이 먼다는 건, 눈앞의 대상을 더는 보지 못하고(혹은 보지 않고), 감긴 눈꺼풀 속에서 비로서 모습을 드러내는 허상을, 그 실체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속한 대상을 본다는 말이 아닐까. 


7. 이제 마르셀의 (첫)사랑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질 기세인데, 스완의 사랑과 어떻게 다를지 비교하며 읽는 묘미가 있을 것 같다. 


"그가 빠져나온 그의 삶의 매우 특별한 시기에 대해, 그 시기에 머물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직 가능한 동안 그 시기에 대한 어떤 뚜렷한 이미지라도 가져 보기 위해 자주 노력했지만 이미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사라져 가는 풍경을 바라보듯 이제 막 자신이 떠나온 사랑을 바라보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을 둘로 나누거나, 소유를 멈춘 감정의 진실된 모습을 재현해 보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곧 어둠이 그의 머릿속을 가리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그러자 그는 보기를 단념하고는 코안경을 벗어 알을 닦았다. pp323-324"  

 

“오데트의 창백한 얼굴이며 지나치게 여윈 뺨이며 초췌한 표정이며 푹 꺼진 눈이며-애정이 지속되는 동안 오데트에 대한 끈질긴 사랑이 그녀로부터 받은 이 첫 번째 인상을 오랫동안 망각하게 했던-그들이 처음 관계를 맺은 후부터 더 이상 주의하지 않게 된 그 모든 것들을 다시 보았고, 또 아주 가까이 느꼈다. 아마도 잠을 자는 동안 그의 기억이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정확한 감각을 찾으러 갔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더 이상 불행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도덕적인 수준도 낮아지면서 그에게 다시금 나타나는 저 간헐적인 비열함으로 이렇게 외쳤다.
“내 마음에 들지도 않고 내 스타일도 아닌 여자 때문에 내 인생의 여러 해를 망치고 죽을 생각까지 하고 가장 커다란 사랑을 하다니! p330”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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