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STOK 45호 <시선에 관하여>
보스토크 매거진 45호의 주제는 <시선에 관하여>. 미국 사진작가 아르네 스벤슨ArneSvenson의 <The Neighbors> 시리즈로 포문을 연다.
인물들은 대체로 뒷모습이거나 일상적 행위를 하는 신체 일부로 등장하며, 진회색 철근 프레임과 커튼, 방안에 깃든 빛과 어둠 등이 피사체를 프레이밍한다. 잔 빗방울이 유리창 가득 흩뿌려진 너머로 막 외출준비를 끝낸 듯한 여자의 뒷모습은 어느 갤러리에 걸려 있을 법한 오래된 유화 같았고, 누군가의 품에서 오동통한 팔다리를 휘저으며 버둥거리는 어린아이는 살구빛 도는 피부와 금발머리의 화사하고 부드러운 색조로 푸토putto를 떠올리게 한다. 인형을 마주 안은 채로 흔들의자에 발을 꼬고 앉은 소녀는 어둠에 잠긴 실내 쪽으로 고개를 틀고 있다. 한줄기 햇빛이 소녀의 파란색 반팔소매에서 맨살 드러낸 팔과 올리브그린색 의자의 팔걸이, 흰색 쿠션 위로 떨어지고, 그 외의 부분들은 어둠 속으로 부드럽게 녹아든다. 회화적으로 아름다운 사진들이다.
하지만 이런 기분 좋은 감상을 이어갈 수 없었다. 작가의 글을 읽고 혼란스러워졌기 때문이다.
스벤슨은 자신의 맨하탄 스튜디오 맞은편 아파트 주민들을 1년간 망원렌즈로 촬영하여 인근 갤러리에서 전시를 열었고, 몇몇 피사체(알려지기론 아이)의 가족들이 초상권과 사생활 침해로 전시 금지 가처분 신청 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창작의 자유를, 검열의 선례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 주민들은 사생활을 보호받고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대상화되지 않을 권리를 주장했다. 결과는? 스벤슨이 이겼다. 항소심까지 모두 승소했다. 법원은 만장일치로 예술가의 ‘표현의 자유’를 더 존중했다. (그럼에도 Renwick 판사는 개인정보보호가 점차 위협받고 있는 만큼 관련 법안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덧붙였으나.)
이에 대한 박지수 편집장의 글은 판결의 이해를 돕기도 하지만 고민을 더 이어가게 한다. 그는 대상의 ‘익명성’이 어떻게 발현되었는지 작가의 시선과 연결하여 설명하는데, 이 대목에서 눈이 번쩍 뜨이는 듯했다.
작품 속에서는 일상의 한 순간, 누구에게서나 찾아볼 법한 상태와 몸짓이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니 인물들은 특정화되기 어렵다. 즉 개성을 제거해서가 아니라 인간 행위의 보편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춘 결과 익명성이 발현되었다는 것.
사진에서 부각되는 특성을 ‘익명성’이 아니라 ‘보편성’이라고 해석하니 예술적 층위가 달라지는 것 같았다. 작가는 이를 ‘진실되고 부드러운 인간성’이라 불렀다. 사적인 순간에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몸짓과 자세가 우리가 보편적 인간으로서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보여준다니... 이런 시선은 새롭고, 묘하게 감격적이기도 하다. 날카로운 파편처럼 흩어져 있다 하더라도 우리를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묶어놓는 부드러운 순간들이, 과연 있다. 있지만...
역시 불편하다.
작가의 목표는 성취된 듯 보인다. 그의 카메라는 빛과 유리창과 대상의 조우를 바라던 대로 섬세하게 포착했으며, 일상의 평범한 순간들을 예술적으로 재현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 방식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작품과 뒤얽힌 소송사를 알고 나니 감상은 껄끄러운 뒷맛을 남겨버렸다.
공개된 사진들은 소송과정에서 동의를 얻어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웃들이 타인의 시선에서 예전만큼 자유로울 수 있을까. 사적인 공간에만 깃드는 방심의 평안을 이전처럼 누릴 수 있을까. 질문은 꼬리를 물고 찾아온다.
작품들이 회화적 사진이 아니라 사실적 회화였다면 어땠을까? (재현매체와 표현방식에 따라 침해 정도가 다르게 느껴질까?) 사진이 찍힌 장소가 집이 아니라 거리였다면? (그렇다면 초상권의 문제는?) 전시 시점이 아주 먼 미래, 가령 피사체와 작가의 사후라면? (나는 여전히 창작 윤리를 따지려나.)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을 권리까지 생각이 이어지던 끝에 카프카의 유언까지 떠올랐다. 사후 소각해달라는 일기와 편지 모두 출간되고 말았지. 법정스님도 비슷한 유언을 남겼지만...
자유와 권리가 충돌하는 경계선이 내 마음속에서도 조금씩 달라진다. 어렵다.
크리스 베린Chris Verene의 <카메라 클럽> 시리즈도 인상적이었다. 관습적인 여성 누드 유화 · 사진속에서 숨겨져 왔던 '시선의 주체'를 '시선의 대상'과 함께 한 프레임 속에 노출한다. 보이는 자는 흐릿한 배경 혹은 배경의 일부로, 보는 자의 뒷모습은 전면에 배치함으로써 시선의 욕망이 객체를 어떻게 대상화하는지 현시한다. '보는 자'가 주인공인 동시에 구경거리의 일부가 된다. 또 다른 시선, 바로 이 사진들을 들여다보는 '구경꾼'의 시선은, '대상'만 존재하는 사진을 볼 때와는 다르게, 관음하는 욕망의 시선에 더는 합류할 수 없다. '시선의 폭력과 약탈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현장의 증인이 된다.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3장을 레퍼런스 삼고 메리 커셋Mary Cassatt의 <검은 옷을 입고 오페라 관람석에서>와 비교해보니 베린의 사진과 커셋의 유화 속 시선들이, 누가 무엇을 어떻게 보는지 그 시선들의 격차가 첨예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