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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Oct 26. 2024

한여름밤의 잔혹 독서

루스 렌들,《활자잔혹극》


미스터리 스릴러 하나 읽지 않고 여름을 넘기는 건 아쉽다. 올여름은 유난했지. 폭염· 폭우의 폭압적 난타가 처서 지나서도 멈추질 않고... 불쾌지수가 솟구치는 밤이면 공포물이 당긴다. 여름 초입이었나. 친구와 이토준지 호러하우스에 가려 한다는 J의 말에 나는 대뜸 진저리 치며 말했다. "으, 재밌겠다!" 원체험이 이래서 중요하다. 내가 어떤 쟝르로 독서를 시작했는지 새삼스러워진다. 그 쟝르에 대한 묘한 향...수마저 느껴지다니(토미에도 소용돌이도 다시 보고 싶진 않지만). 취향은 바뀐다기보다는 확장되는 게 아닐까. 언제고 돌아갈 태세를 늦추지 않은 채로. 그날 J는 홍대 한 만화방에서 이토 준지를 읽다 느지막이 돌아왔다. 좋은 때다.     

     

얼마 전에 읽은 무라타 사야카의 단편집 《신앙》은 표제작을 제외하곤 밍밍했다. 데뷔작이 기대감을 너무 높여놨는지도. 오랜만에 일본 소설을 읽었더니 본격 미스터리가 당겼다. 미쓰다 신조와 유키 하루오 중에서 고민하던 참에 엉뚱한 소설에 사로잡혔다.       




#루스렌들 #영국추리소설거장 #범죄소설 #북스피어 #복간할결심시리즈

     


《활자잔혹극》은 한 중년 가사도우미의 일가족 살해 사건을 비극의 시발점에서부터 추적하고 파헤치는 범죄소설이다. 인물을 분석하고 독자를 안내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리는 까닭에 실제 범죄를 재구성한 논픽션 소설처럼 읽히는 맛이 있었다. 추리와 해결 과정에서 오는 지적 쾌감이나 서스펜스가 목적이 아니므로 작가의 분석에 얼마나 설복되는지에 따라 재미와 만족도가 달라질 듯.         

 

무엇보다, 이변이 없는 한, 올해 만난 책 가운데 제목과 첫 문장이 가장 강렬한 소설로 기억될 것 같다. 여러 함의를 품은 듯한 원제도 인상적이지만 번역제목은 직관적으로 마음을 사로잡는다. 활자중독자로서 거부할 수 없는 제목인데다가 이런 첫 문장이라면 시작하지 않을 수 없지.     


“유니스 파치먼이 커버데일 일가를 살해한 까닭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이다.” p7  

   

이 소설을 어느 카테고리에 넣어야할까.


1970년대 영국사회의 계급성, 허영과 시혜의식으로 가득 찬 부르주아 계급과 (종전 후) 교육 소외 노동 계층(더불어 계급간의 갈등을 극대화하는 광신도)의 불운한 충돌 등에 초점을 맞춘다면 '사회파 미스터리'로 분류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런 계급 갈등은 그저 배경에 불과하며 범죄사건을 좇는 과정에서 발생하기 마련인 서스펜스라든가 독자가 개입(추리)할 만한 여지 따위가 크지 않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여타 미스터리 소설과 궤를 달리한다.


첫 문장에서 누가 누구를, 특히 '왜' 죽였는지 선포하고 시작하지만, 사슬처럼 엮여 있는 원인들을 차근차근 파고들기 때문에 '와이더닛' 류의 재미 또한 지니고 있다. 그뿐인가. 인간의 추악한 본성이나 이상심리를 들춰내 불쾌한 뒷맛을 남기는 '이야미스 소설'의 면모도 엿보인다.


한편 작가가 이야기 전면에 나서서 던져주다시피한 주제를 생각해 보면, 굳이 쟝르소설로 의식할 필요가 있겠나 싶기도. '문맹'이라는 화두는 그 외연을 확장한다면 기본 문맹률 1%의 한국사회에서도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있다. 코로나 19 이후 대두된 디지털 소외계층과 끊이질 않는 문해력 논란은 차치하고서라도, 나날이 첨예해지는 집단 간 혐오· 갈등, '도덕적 문맹', '비판적 미디어 리터러시'의 부재까지 교육의 문제로 거칠게 환원한다면 말이다.

     

이 소설은 유니스라는 인물을 통해 문맹과 인간성의 상관관계라는 논쟁적인 화두를 던진다. 과연 읽고 쓰지 못하는 것이 일가족 몰살이라는 범죄의 동기가 될 수 있을까. 소설 전체를 오롯이 떠받치는 첫 문장의 관건은 이야기의 끝까지 독자를 붙들 수 있느냐인데, 이 소설은 그걸 거뜬히 해낸다. 그럼에도 '문맹'이 파국의 절대적인 조건이 될 수는 없다. 확실히 “여기에는 더 깊은 사연이 존재한다.”     



“유니스는 숨 쉬는 돌이었다. 지금까지 항상 그랬던 것처럼.” p247


La cérémonie (Claude Chabrol, 1995) 베니스 공동여우주연상 수상. 원작을 훌륭히 영상화했다고 극찬을 받았다는데, 소설 속 이미지와의 괴리감이 너무...


소설을 읽으며 내가 떠올린 건 작년에 읽었던 마사 누스바움의《타인에 대한 연민》이었다. 이 책은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정치적 감정들의 본질을 파헤치는데, 무엇보다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는 분노와 혐오가 '원초적 두려움'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주장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감정에도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것.

      

《활자잔혹극》을 '감정'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바라보면 굉장히 흥미롭다. 커버데일 부부의 (계급성이라기보다는) 원초적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혐오, 멜린다의 배려의 탈을 쓴 오만, 조앤의 시기심과 분노, 그리고 유니스의 원초적 두려움과 수치심. (또 하나 덧붙인다면 유니스와 자일즈의 자폐적 나르시시즘. 두 사람은 '문맹과 탐독'으로 극단적 대비를 이루지만,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외부세계와의 불통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유아기의 원초적 두려움은 언제고 우리를 급습할 준비가 되어 있다. 신체의 취약성과 삶의 유한성에서 비롯되는 무력감과 두려움은 인생의 굴곡마다 도사리고 있다. 유니스의 경우에는, 우리가 첫 애착관계와 교육경험, 다양한 사회적 교류를 통해 극복하게 되는 유아기의 나르시시즘이 '문맹'과 그로 인한 '고립'으로 강화된 듯 보인다. '병리적인 수치심'은 자아가 형성되는 과정에 절대적 영향을 끼쳤을 터였고, 조건만 갖춰지면 폭력적으로 표출되었을 것이다. 협박, 살인, 일가족 몰살. 커버데일 가족이라는 발작버튼과 조앤이라는 트리거를 만난 순간 폭주하게 된 건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보인다.      


“그녀는 활자로 도배된 세상이 끔찍했다. 활자를 자신에게 닥친 위협이라고 생각했다. (...) 따뜻한 마음이나, 타인을 향한 애정, 인간적인 열정이 솟아나는 샘은 이러한 이유로 오래전에 말라 버렸다. 이제는 고립된 상태로 지내는 일이 자연스러웠고, 이러한 자신의 상태가 인쇄물이나 책, 손으로 쓴 글자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행위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녀가 문맹이라는 사실은 그녀의 동정심을 앗아갔고 상상력을 위축시켰다. 심리학자들이 애정이라고 부르는, 타인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은 그녀의 기질 안에서 설 자리가 없었다.”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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