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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목의 빛

벵하민 라바투트,《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by islander


남편이 내 방문을 열다 말고 흠칫 얼굴을 굳혔다. 갑자기 열린 문에 나도 울다 놀랐다. 눈물 젖은 휴지를 꼭 쥔 손으로 나는 노트북 화면을 가리켰다. 아니, 너무 감동적이잖아... 14인치 화면에서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가 재생되던 중이었다. 명문 자사고 경비원으로 일하는 탈북 천재 수학자가 인생 초년기부터 홀로 분투 중인 소년에게 그가 어디에서도 받지 못했던 귀한 것을 전해주고 있었다. 영화 속 두 사람의 다정한 밤 산책은 막을 내렸고, 감동의 한복판으로 난입한 남편은 미묘한 미소만 남기고 문 뒤로 사라졌다(내 감동 물어내...).



탈북한 천재 수학자 이학성(최민식)은 모종의 비극을 겪고서 신분을 숨긴 채 명문 자사고 경비원으로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한지우(김동휘)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통당하고 매일 밤 그에게 수학을 가르치게 된다. 사배자전형으로 입학하여 수학 내신 9등급을 받고만 지우에게 담임은 전학을 종용하지만, 이를 우연찮게 알게된 이학성은 지우에게 물러서지 않도록 격려한다.


이보라, 수학을 잘할라믄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아네?
머리겠죠, 뭐.
머리 좋은 아새끼들이 제일 먼저 포기한다.
그럼 설마 ‘노력’ 이런 거 아니죠?
그 다음번으로 나자빠지는 놈들이 노력만 하는 놈들이야.
그럼 뭔데요?
용기.
아, 뭐. ‘아자, 할 수 있다’ 뭐, 이런 거요?
고거는 객기고. 문제가 안 풀릴 때는 화를 내거나 포기하는 대신에 ‘이야, 이거이 문제가 참 어렵구나, 야. 내일 아침에 다시 한번 풀어봐야 갔구나’ 하는 여유로운 마음. 고거이 수학적 용기다. 기렇게 담담하니 꿋꿋하게 하는 놈들이 결국에는 수학을 잘할 수 있는 거야.
저랑은 먼 얘기네요.
니 얘기야. (나는 울기 시작했다...)
틀린 게 더 많네요.
틀린 답은 많지만 풀이 과정이 옳다. 전학 가지 말라.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으면서 여까지 힘들게 오지 않았네? 기럼 된 기야. 기러니까 증명하라. 전학이 옳은지 그른지. 알간?


<파인딩 포레스터>와 <굿 윌 헌팅>의 잔영이 드리워진 영화는 런닝타임이 짧게 느껴질 만큼 전개가 깔끔하며 성장담의 익숙한 공식을 따른다. 기억에 남을 한 장면만 꼽는다면... 역시나 피아노로 원주율을 연주하는 장면이려나(예고편도 이 장면에서 시작한다).


https://youtu.be/s6UPaXuEwi4


'수학적 아름다움'이라 나 홀로 명명한 시퀀스는 '오일러의 공식'에서 시작한다. 수학자는 자신이 어쩌다 수학에 빠졌는지 이야기하던 끝에 이른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식'을 꺼내든다. 모든 늘어뜨린 줄을 표현할 수 있는 '자연상수', '파이', 상상의 수 '허수', '가장 작은 자연수 1'과 '없음을 표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역설의 숫자 0'. "자연 상수의 파이에 허수로 제곱을 했는데 어째서 이 0이라는 실수로 딱 떨어지냐? 아무리, 아무리 봐도 기가 막힌단 말이디."(그러니까 무한히 이어지는 수에 존재하지 않는 수로 제곱하고 1을 더하는데 0이 된다...는 생각을 도대체 왜 하죠? 어떻게 하죠?)


그는 '오일러의 공식'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설파하지만 우리의 수포자 소년은 (나와 마찬가지로) 심드렁하다. 신기하긴 한데 아름다울 것까지야. 그러자 수학자가 "본때를 보여주갔어," 하며 피아노 앞에 앉는 것이다. 도가 1, 레가 2, 미가 3... 그렇게 3.14159265... 원주율은 악보가 된다.


수학적 용기가 삶의 용기로 해석되고 숫자의 세계가 피아노의 선율로 번역되어서야 비로서 나는 받아들이게 되었다. 감히 범접하지 못했던 세계의 아름다움을. 이럴 때 예술의 힘에 탐복한다.




최근 나는 이와 비슷한 감흥을 두 권의 책을 읽으며 연이어 경험하고 있다.《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 전자에서는 난해하기 짝이 없는 과학의 언어가 감각적인 문학의 언어로 옮겨지고, 후자에서는 보면서도 보지 못한 것들을 보지 않으면서 보게 되는, 기묘하고 유쾌한 감각의 전이가 일어난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블랙홀의 발견('슈바르츠실트 특이점'), 모든 기하학적 구조를 관통하는 본질을 찾아 수학을 통일하려 한 그로텐디크('심장의 심장'), 슈뢰딩거의 파동역학과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 그리고 불확정성 원리('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어지러운 기호와 수식의 안갯속에 잠겨 있던 세계가 이야기를 덧입어 형체를 드러낸다.


과학자들은 이 책을 어떻게 읽을까. 블랙홀이니 양자역학 따위는 영화 소재로만 소비한 이 평범한 문학애호자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재미있게 읽었다. 아르키메데스? 유레카! 외치며 목욕탕에서 뛰쳐나온 과학자? 그렇게 유체역학 원리 따위 안중에도 없는 이 이야기 중독자는 발견의 내용보다 발견의 순간에 사로잡힐 때가 많다. 천재들의 이야기라면 특히 그렇다. 내 인지적 능력과 감각으로 도무지 인지할 수 없는 세계라면 더욱 더. 게다가 뭔가에 광적으로 홀려 있는 사람은 보는 이 또한 홀리게 하지. 한 세계의 끄트머리에 선 자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아슬아슬하여 시선을 뗄 수 없다. 이 책에는 미지의 물질세계를 규명하고자 자신을 한계까지 밀어붙인 이들이, (이를 수학의 언어로 증명하려는) 이성과 (불가지의 세계로 넘어가려는) 광기의 격돌이 생생하게 포착되어 있다.



원제는《Un Verdor Terrible》, '끔찍한 초록'이다. 과학기술의 양면성, 그로 인한 인류문명의 '파괴적 성장'을 뜻한다고 생각했다. 첫번째 에피소드 '프러시안블루'가 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프러시안블루는 최초의 현대적 합성 안료로서 고가의 광물 추출 안료인 울트라마린을 대체하며 인기를 끌었다. 한때 황금보다 귀했던 '파랑'이 마침내 저가로 화가들에게 공급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합성과정에서 '시안화물'이라는 독성 부산물이 탄생하고 만다. 시안화물은 살충제로 쓰였으나 훗날 강제수용소에서 유대인을 학살한 독가스(치클론B)로 개발된다. 이를 주도한 사람이 바로 유대계 독일인 화학자 프리츠 하버다. 그는 공기 중 질소 추출로 인공비료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했고, 산업혁명 후 대두된 식량난을 해결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화학상을 받는다. 뼛속깊이 독일인이었던 그는 전쟁이 터지자 화학무기제조에도 앞장선다. 그가 일명 '공기에서 빵과 죽음을 만든 과학자'로 알려지게 된 연유이다. (하버가 아내에게 썼다는 편지가 사실이라면) 그가 두려워한 "끔찍한 초록"은 자신의 연구 결과로 인한 식물의 무한 증식이었다고. 실상 참상을 일으킨 건 식물의 끔찍한 번성이 아니었다. 초록빛 구름 형태를 띤 그의 독가스였다. 독일인으로서 독일을 사랑했지만 훗날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추방당하다시피하였고, 인류를 기아에서 구하고 참혹한 죽음으로 내몰았다. 아이러니하다.


첫번째 에피소드는 논픽션 과학 에세이처럼 읽힌다(작가의 말에 따르면 허구가 한군데 밖에 없다고).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논픽션과 픽션, 에세이와 소설, 사실과 허구의 경계는 점차 허물어지고 마지막 에피소드에 이르러서는 (거의) 완전한 픽션의 세계로 넘어간다.


마지막 에피소드 ‘밤의 정원사’편은 '프러시안블루'와 수미상관을 이루는 에필로그 같다. 앞선 이야기들이 전기의 하이라이트를 뚝 떼어낸 토막글처럼 보인다면 이 글은 상징과 비유로 가득한 엽편소설이라 해도 무방하다. 식물 역병, 나무들의 죽음, 밤의 정원사, 평생 돌본 나무에 목을 매고 죽은 그의 할머니, 해마다 동네의 개들을 죽이는 익명의 이웃, 쓰레기 더미 위에 지어져 천천히 성장하는 정원과 늙은 레몬나무가 죽는 방식. 이 모두가 인류 문명의 과잉 성장이 불러올 파국을 예언하는 듯했다. 한편 인류 역사를 바꿔놓은 순간들에 저자가 덧붙인 문학적 주해 같기도. 여러모로 독특하고 매력적인 소설이다.


“고작 흙 입자 하나에 원자 수십억 개가 들어 있다면 대체 어떤 방법을 써야 그토록 작은 것에 대해 유의미하게 이야기할 수 있겠나?” 시인과 마찬가지로 물리학자 또한 세상의 사실들을 단순히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은유와 정신적 연결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p125



덧.


1. 슈바르츠실트 편을 읽고나니 이 책이 어디로 향하는지,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돌이킬 수 없는 선, 그 문턱을 넘어선 자들, 다른 차원의 사유가 이끌어낸 놀라운 결과물, 개인만이 아니라 인류 문명의 운명)이 무엇일지 짐작되었다. 특히 인간 정신의 어떤 조건이 참혹한 전쟁으로 이어지는지를 블랙홀의 특이점과 연결지어 이야기하는데, 소름 돋도록 짜릿했다.



2. 슈뢰딩거와 하이젠베르크 편에서는 불확정성을 논하는 대목에서 하이데거와 사르트르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우리가 확정된 존재가 아니라 '되어가는 존재'라면, 마치 관측행위가 입자의 상태에 영향을 주고 결정짓듯이, 인간이란 존재도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하는지에 따라 선택이 달라지며 여러 형태로 존재하던 존재적 가능성 중 하나가 실현되는 게 아닐까.


3. 프리츠 하버 일화는 '오, 하버-보슈 공정! 알지, 알지!' 페이지를 넘기며 내심 뿌듯해했다.물질의 세계('생명을 죽이고 생명을 구하는 소금'편) 덕분이다! 식물 생장을 돕지만 화약의 핵심성분이기도 한 질산칼륨은 소금의 일종으로, 칠레와 페루-볼리비아 동맹 사이에서 벌어진 5년 전쟁의 주역이 되어 소금 전쟁사의 맥을 잇는다. 그리고 하버는 이를 이용해 화학무기제조에 나선다. '물질세계와 과학기술의 딜레마'라는 연결고리 덕분에 라바투트의 책에 바로 몰입할 수 있었다. 올 상반기 독서 베스트는 이변없이물질의 세계.


4. 그의 또 다른 소설 《매니악》을 빌렸다. 역시나 과학자들이 등장하는데, 제목만 봐도 광기 쪽으로 더 밀어붙인 느낌이다. 비이성과 광기와 (인공지능의) 망상이라니! 이 책의 또 다른 주인공은 이세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읽었을까. 읽었다면, 공감했을까. 어떻게 읽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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