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이 산책들이 내 머릿속에 미친 영향은 손에 잡힐 정도로 또렷하다. 내 시야는 완전히 달라졌다.
먼저 아버지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어느 시절, 나는 아버지에게 툭하면 전화하여 일과 관계의 고단함을 호소하곤 했다. 그건 아버지가 아직 정정했고 내가 어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터였다. 그날도 나는 아버지를 붙잡고 지금은 기억도 나질 않는 어려움을 토로했다. 아버지는 내 하소연을 잠자코 듣던 끝에 당신의 비법 하나를 내게 전수했다. 그에게는 어떤 어려움에 처할 때면 마음속에 등장시키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몇몇 지인들을 상황별로 분류시켜놓고서 당신이 특정 상황을 맞닥뜨리면 해당인물의 처세술을 떠올리곤 했던 것이다. 이럴 때 신 사장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묻는 거지, 그리고 그렇게 한번 해보는 거야. 아버지는 그게 꽤 효과가 있었다고 했다.
그때 나는 아버지의 이야기에 추임새를 넣으면서 언젠가의 오프라 윈프리를 떠올렸다. 풍채 좋고 (어쩐지 화려한 드레스 차림의) 풍만한 그녀가 특유의 단호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들로 주위를 채우세요. 회상은 끝났으나 상상은 이어졌다. 그녀가 난데없이 손을 활짝 펼쳤던 거다. 적어도 다섯이 필요합니다. 당신보다 더 나은 인간, 다섯. 다섯이라는 숫자가 어떻게 나왔는지는 도통 모르겠다.
어쨌거나 두 사람의 조언은 통하는 바가 있었다.
나는 그날의 대화를 곰곰이 되짚어보다 그때와는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아버지는 당신보다 ‘더 잘’ 대처할 ‘더 나은’ 사람이 아니라, 당신과는 ‘다르게’ 대처할 사람을 떠올렸던 게 아닐까. 반복되는 문제라면 다른 시각으로 관찰하여 다른 해법을 마련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을 관통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영역의 전문가들과 산책에 나선 동물관찰가가 있었다. '같은 길을 걸어도 다른 세상을 보는 법'이 있다는 걸 그녀는 열한번의 산책으로 증명해내는데, 얼핏 생각해봐도 그럴법한 주장이다. 시각이 달라지면 세계의 세부를 다르게 인지, 분석할 수 있으며 그렇다면 그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 또한 달라지지 않겠는가. 문제는 그 시각을 바꾸는 게 퍽 어렵다는 점이다. 나고 자란 가정환경과 특정 훈육방식, 전문적인 교육, 개인의 취향이나 기질 혹은 신체적 특성. 이런 요소들을 시간이라는 힘센 망치가 두들겨대서 세상을 보는 단단한 틀이 형성된다. “다른 것을 생각하라(Think Different).” 이 근사한 메세지를 실천하는 건 쉽지 않다. 스티브 잡스가 광고 카피의 탄생을 목도하고 목이 메인 것도, 어쩌면 그가 애플의 이 정언명령을 온갖 고충과 모멸 속에서 몸소 실천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시각을 통째로 갈아엎지는 못하더라도 나와 다른 시각으로부터 영감과 자극을 받을 수 있다면야 다른 시각을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지 않을까. 알렉산드리아 호로비츠는 다른 시각의 가치를 알았고 다른 감각을 일깨우려 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을 '관찰의 인문학'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묶어냈다. 저자, 그리고 그녀가 선택한 다른 시각의 소유자와 산책을 나갈 때마다 독자인 내게도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가령, 저자의 19개월짜리 아들과 산책하는 동안에는 도무지 입꼬리가 내려가질 않았다. 어떤 논리와 경험에도 아직 속박당하지 않았기에 모든 것이 새롭기만한 세상, 어느 한 시절 나 또한 머물렀으나 종내는 추방당하고만 그 세계가 선명하게 되살아났기 때문이었다. 망각 속에 묻힌 내 오랜 ‘첫’ 세상을, O와 삼각형이 ‘전염병처럼 만연한’ 기하학적 세계와 ‘수도관 같은 무생물’이 생명을 얻는 물활론적 세계를 오래 전 나는 내 아이의 시선을 통해서도 맛볼 수 있었는데, 그걸 두 모자와 산책하면서 다시금 감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이는 이제 사춘기에 접어들어 두 세계의 경계에 있고, 자신의 자발적 추방을 공공연하게 획책하는 중이다. 그런 아이의 아기아기한 시절을 회상하며 읽느라 퍽 즐거웠다.
지질학자의 눈으로 본 도시는 또 얼마나 신비로운지. 도시는 이제 거대한 암석과 ‘살아 있는 화석’으로 불리는 은행나무들이 솟은 ‘인공 자연경관의 축소판’이었다. 어느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을 평범한 옹벽은 해저 퇴적물인 석회암이며 그 표면에 3억년된 고대생물의 흔적이 남아 있음을 깨닫는 순간, 도시 곳곳에 감쳐져 있던 ‘바다의 무덤’들이 그제야 모습을 드러낸다. 눈앞에서 도시의 풍경이 순간 바뀌는 경험이라니. 이다지도 근사한 산책이라니...
책을 덮고 생각했다.
꼭 삶의 어려움에 처해서가 아니더라도 시절마다 새로운 공기를 불어넣어줄 사람들이 필요하다.
내 일상의 풍경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할 이들.
그 산책의 동반자가 누구라도 상관없다. 정제된 언어로 내게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면. 책이나 영화 속 인물일 수도 있다. 혹은 카페나 거리에서 스쳐지나가는 이라면 또 어떤가.
가정주부로서 내가 지닌 인적 네트워크(의 한계)를 떠올린다면 어쩌면 그런 만남이야말로 내가 현실적으로 바랄 수 있는 최선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매일 같은 거리를 걸어도 다른 풍경을 보고 싶다는 것. 매일의 일상을 나와 다른 누군가와 산책하듯 살겠다는 것. 그리하여 어려운 시절이 닥쳤을 때 아버지처럼 내게도 떠올릴 누군가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것. 아버지와는 다르게 그 인물이 내게는 문장의 형태로 다가오겠으나.
그렇게 내 평범한 삶의 현장이 그간 ‘주목받지 못한 것들’의 발굴현장으로 탈바꿈되길 바라며...
백일의 산책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