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의 미신과 질병의 편견에 사로잡힐 때
내가 오랫동안 떨치지 못한 질병(혹은 죽음)의 은유는 어린 시절의 놀이와 관계된 것이다. (놀이라니.) 그건 바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이 놀이에서 질병과 나는 술래이며 동시에 술래를 향해 나아가는 무리 중 하나다.
마흔을 넘어가면서 부고와 투병 소식을 심심찮게 접한다. 그 가운데 친구들도 있다. 그 옛날 우리는 출발선에 나란히 서 있었다. 속도를 달리 하며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간발의 차이로 술래에게 지목당하고 말았다. 누군가는 허망하게 떠났다. 누군가는 고집스레 자리를 지켰다. 네가 잘못 봤어. 난 아직 떠날 때가 아니야. 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앞을 향해 다가간다.
몸이 예전같지 않게 느껴질 때면, 나 홀로 술래가 되어 서 있는 것 같다. 어릴 때는 아득하게 멀리 떨어져 있어 보이지 않던 것들. 그 어둑한 것들이 점차 가까워진다. 운좋게 몇몇은 솎아낸다. 몇몇은 끈질기게 나를 향해 다가온다. 노래 한구절이 끝날 때마다 고개를 돌려 보면 눈에 띄게 가까워져 있다. 정체를 알 수 없으나 어떤 기미가 느껴지는. 가깝지도 않지만 멀지도 않은. 언젠가는 저들 중 하나가 내 뒤통수를 낚아챌 날이 오지 않겠는가.
쓸데없는 불안을 떨쳐내기 위해서는 이 은유를 얼른 폐기해야 할 것인데, 습관처럼 따라붙는 이 술래에 대한 이미지를 어쩌질 못하고 있었다. 어찌 됐건 우리의 죽음은 사고사 아니면 병사가 아니겠는가. 자연스러운 죽음은 없다. 자연스러운 소멸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나의 소망은 자연사. 쫄보라 그렇다.
어떤 은유는, 피할 수 없다. 그 대상에 오래 밀착되어 한 몸처럼 느껴지는 것일수록. 가령, 암은 ‘맞서’ ‘싸워서’ ‘이기고’ ‘정복해야’ 하는 ‘적’이었다. 이 군사적 은유가 우리의 무의식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아니, 은유의 사용 그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없었다. 은유를 근사하게 쓰길 원했지, 은유 없는 언어를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수전 손택은 질병에서 은유를 걷어내자고, 질병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의미를 빼자고 주장한다. “지금의 이 세계, 이 신체에 가해진 해석에” 대해 반대하자는 것. 그녀는 자신의 대표작인 <은유로서의 질병> 첫 페이지에서 단도직입적으로 결론을 제시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질병이 은유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가장 진실한 방법으로 질병을 다루려면 –그리고 가장 건전한 방식으로 질병을 겪어내야 한다면- 질병을 은유적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에 될 수 있는 한 물들어서는 안 되며, 그런 사고방식에 저항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녀는 책에 수록된 두 편의 에세이를 쓰기 전에 유방암에 걸린 적이 있었고 절친한 지인들을 에이즈로 잃기도 했다. 그 경험들 속에서 ‘은유의 함정’에 빠진 세계가 환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환자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깊이 관찰할 수 있었다. 어쩌다가 이 세계가 질병의 은유들을 탄생시켰는가. 이 은유들이 어떻게 환자를 절망시키고 수치심 속에서 적극적인 치료를 포기하게 하는가. 그녀는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한다. 방대한 시대별 사료(특히 문학)를 통해 ‘결핵, 역병, 암, 에이즈’를 둘러싼 미신과 신화들을 짚어가다가, 종내는 당대 정치집단이 특정 질병을 어떻게 은유화하여 악용하는지까지 사유를 확장시킨다.
암을 치료하는 와중에 이런 에세이를 썼다는 게 경이롭다. 왜 고통스럽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여느때처럼 명징하게 깨어 있었고 열정적으로 글을 썼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 글을 쓸 시간이 충분하지 않을까 염려했을 뿐.
암의 은유들은 손택이 에세이를 쓸 무렵과 비교해 보면 많이 달라졌다. 더는 암을 ‘망가져 버린 자아’의 원인이나 ‘감정을 억누른’ 결과로 보지 않는다. 더는 암을 신비화시키지도, 심리학적으로 해석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시대별로 질병은 다른 은유를 배당받아왔고, 소수를 배제시킬 목적으로 특정 질병을 악용하는 일은 반복되고 있다. 게다가 질병을 바라보는 태도의 본질은 여전한 것 같다. 은연중에 ‘발병’을 실패의 결과로 보는 것. '스트레스· 균형잡힌 삶· 낙관적인 태도· 건강' 관리의 실패 말이다.
손택의 말이 옳다. 질병은 그저 질병으로만 봐야 한다. 잡힐까봐 두려워하며 피해다니는 무서운 술래도 아니고, 혹 나를 후려친다 해도 끝끝내 쫓아가 목덜미를 움켜잡아야 하는 대상도 아니다. 이런 은유는 내 에너지를 헛되이 쓰게 한다. 내 마음을 혹사시킨다. 그저 어쩌다 맞닥뜨린 삶의 과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 누군가는 일찍, 누군가는 늦게 도달하는 지점이며, 누군가는 수월하게 통과하고 누군가는 거기서 발을 멈춰야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