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하남 Apr 07. 2022

25미터, 그 마음의 거리

약자에 대한 공감보다 경멸이 익숙해진 사회

지하철 역사 장애인 사망사고에 대한 사람들의 냉랭한 반응

오늘(2022년 4월 7일), 매우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다. 서울 지하철 9호선 양천향교역에서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다 추락해 사망하고 만 것이다. 사람이 죽은 사건이다. 그런데, 댓글을 단 사람들은 한 사람의 생명이 다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그가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굳이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했다는 점을 비난했다. 바로 옆에 엘리베이터가 있는데 왜 에스컬레이터를 탔나며 지하철 운영사를 비난하거나, 이동권 시위를 벌이고 있는 장애인 단체가 이 사건을 이용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뒤에 사람이 있었다면 더 큰 피해가 발생했을 무모한 행동이었다고 따끔한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순수하게 죽은 이에 대한 애도를 표현하는 사람은 찾기 어려웠다.


기사는 사실관계 전달을 위주로 작성되고 별다른 의견을 내놓지는 않았지만,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한 장애인의 입장을 고민하기 보다는 서울시의 입장을 전달하고 에스컬레이터 근처에 엘리베이터가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기사에 인용된 서울시 관계자들의 인터뷰는 모두 같았다. 근처에 엘리베이터가 있는데 왜 이것을 이용하지 않고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했는지 이유를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 기사를 쓴 기자 역시 댓글을 단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엘리베이터, '근처'에 있는 거 맞나요?

엘리베이터는 죽은 이가 탑승한 에스컬레이터로부터 25미터 떨어져 있었다. 서울시 관계자와 기자, 기사를 접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25미터를 '근처'로 표현했다. 비장애인에게 25미터는 몇 걸음만 걸으면 되는 매우 짧은 거리이다. 하지만 휠체어를 타고 있는 사람은 이 거리를 걷기 위해 휠체어 바퀴를 수십 번 팔힘을 쓰며 돌려야 한다. 전동 휠체어가 보급되긴 했지만 앉아서 움직여야 하는 사람에게 와닿는 거리는 우리가 인식하는 수준과 같지 않다. 우리는 자다가 소변이 마려울 때 일어나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귀찮아서 침대에서 버티기도 한다. 장애인은 몇 걸음 더 가야하는 불편을 귀찮아 할 권리도 없다는 말인가.


두 다리로 걸어다니는 사람은 도처에 널려 있는 에스컬레이터를 사용할 수 있으니 엘리베이터를 찾을 때 겪는 번거로움이 와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양한 곳의 지하철역을 돌아다녀본 기억을 상기해보면, 막상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려고 할 때 초행길이나 낯선 역사에서는 엘리베이터가 어디 있는지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손에 든 짐이 많은 상황에서, 에스컬레이터가 없고 계단만 있는 지하철역에 내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경우에 엘리베이터가 어디있는지 찾기 어렵거나, 위치를 알고 있더라도 그 장소까지 가는 것이 번거로워 이용을 포기한 경우가 많았다. 죽은 장애인에게 엘리베이터는 과연 가깝게 느껴지긴 했을까. 아니, 25미터 뒤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을까. 양천향교역이 초행은 아니었을까. 엘리베이터 위치를 표시하고 있는 안내판이 앉아서 천장을 봐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기 불편하지는 않았을까.  지하철은 아직 장애인에게는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는 대중교통이 아니다.


약자의 어려움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사회

인터뷰에 응한 서울시 관계자는 다른 이유에 주목했다. 9호선 일부는 민간 자본으로 건설되어 안전장치가 미흡했다는 것이다. 서울시는 이번 사고 이후 9호선 모든 역사의 에스컬레이터 입구에 차단봉을 설치하기로 했단다. 이들의 눈에는 그저 한 장애인의 안전불감증이 사고의 원인일 뿐이다. 이런 기사와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다른 장애인들은 어떤 기분이 들까. 엘리베이터의 위치는 적절한지, 찾기는 쉬운지, 충분히 설치되어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 먼저 아닐까.


걸을 수 없는 약자들에게 에스컬레이터만 지천인 지하철역을 개방하고 알아서 사용하라고 하는 것과, 형식상의 자유민주주의가 주어졌다는 이유만으로 기회의 평등은 주어졌다며 떼쓰지 말라고 윽박지르는 기득권의 주장은 매우 닳아 있다.  우리 사회는 약자에게 너무 가혹하며 그들의 아픔과 어려움에 공감해주지 않는다. 눈앞의 엘리베이터가 절실한 사람에게 미로같은 지도를 건네며 왜 알아보지 못하냐고 탓하며 경멸의 눈빛을 보낸다. 장애인, 난민, 여성, 어린이 등 타자화된 이들이 아프다고 하면, 조용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왜 자꾸 시끄럽게 하고 귀찮게 하냐고 짜증을 내며 물러서게 만든다. 한곳에서는 약자인 사람도 다른 곳에 가서 강자 행세를 하며 약자의 아픔을 조롱한다. 이것이 현재 한국사회 구성원 상당수의 모습이다. 가슴이 아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