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하남 Apr 19. 2022

어, 동남아 출신인데 차가 있네...?

일상에서 드러나는 내 안의 편견

내 안의 차별의식 하나

얼마 전 가족들과 함께 불국사에 나들이를 갔다. 절이긴 하지만 불국사의 봄은 겹벚꽃 아래에서 인생샷을 건지기 위한 관광객들의 차지다. 나도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돌이켜보니 나는 불국사에 머문 한 시간 남짓의 짧은 시간 동안 겪은 두 가지 장면에서, 내 안에 자리한 차별의식을 발견하고 말았다.


꽃구경이 한참이던 차에 근처에서 크게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성인 남성 몇명이 나들이를 나온 것이 보였다. 그런데 덩치 큰 한 명의 손을 다른 남자가 잡고 있었다. 손을 잡힌 남자는 어딘가 걸음걸이나 얼굴 표정이 다소 불편해보였다. 나는 생각했다. 저 사람은 정신지체 장애인이고, 그를 돌봐주는 사람들이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도록 데리고 나왔구나.


나는 차별을 행했다. 손을 잡힌 사람을 주목하고, 남들과는 다른 존재로, 장애인으로 인식해 한동안 주목했다. 그의 손을 잡아주고 동행한 사람들을 아무 근거 없이 도움을 주는 존재로 판단했다. 동행한 사람들이 그의 가족일지, 아니면 단순히 그의 친구일지 모르는데 나는 그를 당연히 복지 대상자로 인식했다. 평소 나는 장애인을 비장애인과 구분하는 인식을 비판해왔지만 아직도 그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절감했다.


내 안의 차별의식 둘

찝찝한 마음을 뒤로한채, 날씨가 더워지고 많은 사람이 몰리면서 우리 가족은 조금 일찍 자리를 뜨기로 했다. 불국사를 나오는 길에 길게 늘어선 차량 행렬을 보며, 아침 일찍 나온 것에 뿌듯함을 느꼈다. 그런데 차량 행렬의 말미에 동남아 출신으로 보이는 여성이 운전석에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또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다. 어, 동남아 출신 여성인데 차를 몰고 있네...?


그 자리에서 무언가 그 이상의 구체적인 내용을 떠올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역시 뭔가 찝찝했는데, 집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역시 내 안에는 고정관념과 편견이 자리하고 있었다. 첫째, 나는 그 운전자를 오로지 피부색과 성별 만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그는 동남아 출신이 아니라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을 수 있으며, 한국인의 아내일 수도 있다. 한국 국적일 수도 있다. 아니, 좀 더 명확하게 말하면 그는 동남아 출신이 아니라 그냥 한국인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피부색이 나와 비슷하지 않으면 당연히 외국인이라고 생각했다.

 

둘째, 동남아 출신으로 보이는 여성이 운전자인 것을 신기하게 여겼다. 무의식적으로 이런 생각이 든 것은, 동남아 출신으로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사람은 차를 소유하거나 렌트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추고 있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아마 내 머릿 속 동남아 출신 여성은 식당 같은 곳에서 서빙을 하며 매우 낮은 임금을 받는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앞서 말했다시피 한국인일 수 있고, 유학생일 수도 있고, 사업차 들렀거나 근처 대학의 교수일 수도 있다. 나는 그의 피부색만으로 그의 사회경제적 수준을 함부로 판단했다. 과거를 돌이켜보니 관광지에서 피부색이 나보다 어두운 외국인(으로 추정되는) 가족이 보이면 역시 주목했던 것 같다. 같은 외국인이어도 백인 가족이었으면 전혀 신기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셋째, 서비스직 일자리의 낮은 임금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식당에서 서빙을 하는 일을 하면 왜 가족들을 부양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추면 안되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차도 운전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할 것으로 전제하고 있었다. 그게 현실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차별의식의 생명력이 끈질긴 이유, 그리고 이 녀석을 몰아내는 방법

나는 평소 사회의 여러 측면에서 나타나는 차별에 대해 나름대로 민감하게 성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평소 수업을 할 때도 최대한 이런 부분을 연결지어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편이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당사자의 입장이 되지 않으면 이렇게 공감이 어렵다. 나의 성찰이 부족한 탓이 가장 크지만, 만약 사회구성원 다수의 인식 수준이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면 왜 그런 것인지 고민했다. 일단 지금 드는 생각을 그냥 끄적여 본다. 사회적 약자(혹은 그러할 것으로 인식되는 존재)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대한 고정관념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은, 슬프게도 대체로 그것이 맞기 때문이다.


백인이 아닌 외국인, 혹은 국제 결혼 가정 출신 한국인은 사회에서 배척당하고 양질의 일자리를 얻기 어렵다. 저임금으로 착취당할 확률이 높으며, 서비스직에 종사할 가능성이 높고 안정적으로 가정의 경제를 지탱하기는 더욱 어렵다. 서비스직에 대한 정당한 대우가 필요하다는 인식은 여전히 미비하며 이들의 임금은 대체로 최저임금선을 벗어나지 못한다. 장애인은 지하철 한 번 타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주변의 도움 없이는 출퇴근은 커녕 외출 한 번도 쉽지 않다.


시도때도 없이 나를 무식하게 만드는 이 차별의식을 없애려면, 근본적으로 사회구조가 보다 정의롭고 공정하며 약자를 배려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 피부색에 관계없이 공정한 기회를 부여받을 수 있어야 하며, 서비스직에 종사해도 삶을 지탱하고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경제적 보상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장애인이 주변 사람의 도움 없이 자유롭게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하고, 건물에서 엘리베이터를 쉽게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사회적 약자들이 더이상 불쌍해 보이지도, 도움이 필요해 보이지도 않아야 한다. 타자화된 존재들과 분리되지 않고 어울려 살며 서로 다르지 않은 존재임을 피부로 인식해야 한다. 사회적 약자라는 존재 자체가 과거의 유물이 되어야 한다. 피부색이나 신체적 장애 등으로 그 사람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추측하는 것이 불가능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 참 아득해 보이는 일이다. 하지만 귀족과 노비의 존재가 당연하던 시대도 있었고, 인류는 그러한 차별을 지워내는 데 성공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상이 있다면, 그것은 진지하게 추구되어야 한다. 그럼 언젠가 현실이 될 것이라 믿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일상의 민주주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