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로 만들어지는 뫼비우스의 띠
라인 전쟁과 힘 대결의 무한 반복으로 상처 입는 사람들
드라마 <펜트하우스>에 묘사된 갑질 대결
아내는 드라마 <펜트하우스>로 태교를 했다. 임신 초기 입덧이 좀 심한 편이었는데, 신기하게 이 드라마를 볼 때는 증상이 멎었다. 뛰어난 작가의 내러티브는 생체 반응조차 통제할 수 있을 정도로 위대하다. 아내 곁을 지키다보니 나도 이 드라마를 종종 시청하게 되었는데, 이래저래 현실성을 따지다 잔소리를 듣기 일쑤였지만 각 배우들의 캐릭터와 연기가 드라마를 잘 이끌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특히 엄기준 배우님은 왜 자꾸 캐스팅이 되는지 잘 알게 되었다. 이 분보다 돈 많고 재수없는 역할을 잘 소화할 수 있는 배우는 찾기 어려울 것 같다.
<펜트하우스>는 상류사회의 이면을 다룬 드라마답게 등장 인물 대부분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잘나가는 집안 출신이거나, 사회적 인식이 나쁘지 않은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강마리(신은경 분)만 그렇지 않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1인 목욕 수요가 늘면서 청년 세대에서 떠오르는 직종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이 드라마의 배경은 세신사를 매우 천한 직업으로 인식하는 부유층의 세계이다.
강마리는 재벌가 사모님들의 세신을 맡으면서 운이 트여 상류 사회로 진입한 인물이며, 주변의 상류층에게 자신의 직업을 숨겼다. 그런데 스토리 상 여러가지 원인이 겹치면서 국회의원 이규진(봉태규 분)의 부인인 고상아(윤주희 분)와의 사이가 틀어졌는데, 강마리의 직업을 알게 된 고상아가 이 사실을 약점 잡는 장면이 나온다.
드라마 특성 상 어떻게든 강마리가 되갚아줄텐데, 그래도 나는 내심 기대를 했다. 세신사라는 직업에 당당함을 드러내고 고상아에게 자신감 있게 맞서는 모습을 보길 바랬다. 아쉽게도, 강마리의 해결사는 자신이 세신을 하던 재벌가 사모님들이었다. 사모님들은 막강한 위용을 뽐내며 고상아에게 혼쭐을 내주고 통쾌함을 선사했지만, 이것이 과연 고상아에게 제대로 된 반성을 이끌었을지 의문이다. 또한 과연 사모님들께서는 다른 곳에서 자신과 관련 없고 지위가 낮은 인물들에게는 어떻게 대할지 생각했다.
라인과 힘에 의존하는 한국 사회
고상아는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반성하기 보다는 더 큰 지위 혹은 뒷배경을 갖지 못한 것을 한탄했을 것이다. 결국 이 장면의 교훈은 정의나 상식을 지키는 것보다 강한 자의 라인을 타는 게 나를 더 안전하게 지켜준다는 현실을 보여주는 수준에 그치고 말았다.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지위 확보를 통해 갑질을 갑질로 갚으면, 과연 언제 이 몰상식한 대결이 끝날 수 있을까.
약자를 힘으로 겁박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믿음이 아니라, 그저 내가 약하기 때문에 숙여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면 힘을 가진 순간 괴물로 변할 수밖에 없다. 나는 교실에서 학생들을 강압적인 방식으로 통제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들의 의견을 들어보려 노력하고, 그들의 입장을 가급적 수용하며 교사의 지도를 따라주길 바란다. 폭력과 권위로 찍어 눌러봐야, 학생들은 내 앞에서만 조심할 뿐 만만하다고 생각되는 다른 교사, 다른 사람 앞에서는 함부로 행동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학교 역시 갑질 사회를 초래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오랜 세월 학생을 찍어 누르고 힘 앞에 순종하게 하는 교사를 능력자로 대우하며 학생부장 을 비롯해 학생을 통제하는 역할을 맡겨왔다. 그러한 체제 밑에서 힘의 논리를 체득한 사람들은 권력을 획득했을 때 약자를 배려하기 보다는 갑질을 일삼는다. 지금은 학교 현장의 학생 지도에 대한 인식도 어느 정도 변화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지만, 예전의 방식이 옳다고 생각하는 관리자와 일부 구성원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후유증을 극복하려면 여전히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갑질을 멈추는 방법은 힘이 아니라 사회적 믿음
사회 구성원 간 힘의 대결이 반복되면 갑질은 사라질 수 없다. 반드시 누군가는 가해자가 되고 누군가는 피해자가 된다. 어느 한 장면에서 피해자였다고 해도 다른 곳에서 뻔뻔한 갑질을 일삼는 정글이 지금의 한국 사회다.
갑질을 하지 않는 이유는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게 옳지 않기 때문이라는 믿음이 사회에 뿌리내릴 때 이런 악순환을 멈출 수 있다. 힘이 아니라 도덕과 상식을 따르려는 사회 풍토가 조성이 되어야 하는데, 이는 결국 다시 일상의 변화부터 시작해야 한다.
나이나 제도적 지위를 근거로 비상식을 강요하지 않고, 자신보다 약자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그 어떤 힘도 타인의 인격을 짓밟을 수 있는 권리는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 책임은 단순히 펜트하우스에 사는 기득권층에게만 있지 않다. 현대 사회의 계층은 획일적 기준으로 강자와 약자를 나눌 수 없다. 차별은 고위 관료나 부자들만 행하는 것이 아니다.
갑질은 일단 나부터, 당신부터 멈추어야 한다. 음식을 서빙하는 종업원에게 반말이 아니라 존댓말을 써야 한다. 나보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말을 놓지 않아야 한다. 부하 직원의 일처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면박을 주어서는 안된다. 조심할 것이 참 많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 변할 수 있으며, 존경을 받으며 권력을 누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