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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임스 리 Aug 08. 2021

3. 불의

탐욕을 상징하는 악마. 마몬 또는 맘몬(Mammon)이라 부른다. 검은 몸에 새의 머리가 두 개, 손발톱이 긴 손발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밀턴의 『실낙원』에 따르면,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 중 가장 치사한 근성의 소유자로, 천계의 천사였다고는 하지만, 항상 고개를 숙이고 황금이 깔린 보도만을 쳐다보고 있었다고 한다. 숨겨진 황금이나 보물을 찾아내는 능력을 가졌으며, 인간이 지구의 내부에서 광석이나 보물 등을 파내게 된 것도 마몬의 근성이 옮겨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환상 동물사전, 2001. 7. 10., 구사노 다쿠미, 송현아)


보이지 않는 손

아담 스미스는 그의 저서 국부론(1776년)에서 시장 경제의 작동원리로 ‘보이지 않는 손’을 발표하였다. 즉, 높은 가격을 원하는 공급자와 낮은 가격을 원하는 수요자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존재하며, 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말미암아 시장을 자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만족을 모르는 인간의 이기적 탐심은 선과 악의 분별력을 잃어가며, 담합, 투기 등의 불의한 방법으로 시장을 교란시키며 끝없이 사익을 추구하고 있다. 이제 수백 년간 지탱해 온 경제 이론에 시장을 맡기기엔 우리의 이기심이 정의롭지 못하다. 혹시, 보이지 않는 손 뒤에는 인간의 이기적 탐욕을 자극한 맘몬의 숨겨진 계략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불의한 일들은 왜 발생하는가

광주 학동 재개발 건물 붕괴 사고 (2021.06.09)
남양유업 코로나19 억제 효과 과대광고 (2021.04.13)
잇단 집값 담합 논란… 부동산 공화국 '천태만상’ (2021.07.21)'
법무부 차관 OOO 금품 수수 및 성접대 사건 등등


불의한 뉴스들이 끊임없이 발생되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올라오는 뉴스들을 보면, 마치 누군가 일부러 심어놓은 시한폭탄들이 연속해서 터지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또 나의 꿈을 위해 열심히 살고 있는 이들밖에 보이질 않는데, 누가 폭탄을 심는 것일까?


이 문제를 깊이 파고들면, 공통된 근본 원인을 마주하게 된는데, 첫번째 그것은 돈에 대한 인간의 이기적 탐욕이다. 

학동 재개발 건물 붕괴사고 (아시아경제 2021.6.9)

광주 학동 재개발 건물 붕괴사고는 버스 정류장에 정차 중이던 시내버스를 덮쳐 버스 안에 있던 승객 9명이 영문도 모른 채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다. 경찰은 근본 원인으로 계약 체결 과정에서 이뤄진 수억 원대의 불법 금품 수수와 입찰 담합 행위를 지적하였다. 결국, 공사를 수주하기 위해 수억 원대의 불법 자금이 쓰였고, 이를 회수하기 위해 불법 하도급 업체 선정, 기본에 어긋난 무리한 공사방식을 선택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피해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이웃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되었다. 이 슬픔을 버겁게 이겨나가고 있는 유족들은 이 사건은 대한민국 재개발 사업의 관행적인 비리 문제라며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며, 이 악한 관행이 뿌리 뽑히길 간절히 원하고 있다.


그 외 남양유업은 자사의 불가리스 플레인(유산균 음료)이 코로나 19 항바이러스 효과가 있음을 확인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전염병이 창궐한 이 시기에 전염병을 이용한 무리한 마케팅을 벌인 것이다. 그들의 마케팅은 전염병으로부터 국민을 지키기 위함이었을까, 아니면, 기업 이윤이 목적이었을까?


탐욕의 신 ‘맘몬의 근성’이 정말 우리에게 옮겨온 것일까? 황금을 좋아해 고개를 숙여 땅만 보고 다녔다는 맘몬이라는 악마. 우리는 골드 러시를 거쳐 지금은 부동산 러시, 비트 코인 러시에 나라 전체가,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부동산 공화국이라는 뉴스의 헤드라인 제목이 나올 정도로 우리의 영혼은 ‘돈’에 사로 잡혀있다. 그리고 인터넷에서마저 황금을 채굴하려 애쓰는 우리들을 볼 때, 맘몬의 근성이 우리에게 전이되었다는 말에 신빙성을 갖게 된다.


두 번째 원인은 사회의 불의한 관성이다. 그 관성은 우리의 탐심을 스스로 합리화시키며, 사회 내부에 불의한 관성을 키우고 있다. 그리고 추종하는 무리들에 의해 사회에 어두운 세계, 굽은 길이 만들어지고 있다. 2019년 3월 민갑룡 경찰청장은 국회 행안위 전체회의에서 2013년 당시 경찰이 김 전 법무부 차관의 성접대 사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명확한 동영상을 추가 확보했었고 이를 검찰에 넘겼다고 공식적으로 밝혀 큰 파장을 일으켰다. 왜냐면, 그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육안으로 식별이 불가능하였다고 발표하였으며, 검찰은 무협의 불기소 처분을 내린 상황을 국민들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검찰 내부에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불의한 관성이 존재한다는 합리적 의심이 드는 증거가 되었으며, 검찰개혁을 촉구하는 또 하나의 빌미가 되었다.


이 문제 안에는 검사나 마케터 모두 ‘조직의 불의한 관성’에 이끌려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 불의한 관성에 이끌려 가는 것일까? 실제, 조직 내 불의한 관성의 크기는, 보이지는 않지만 매우 크고 공고함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불의함을 느끼면서도 거대한 관성의 크기 앞에 포기하고 만다. 또는 불의한 관성의 집단이 권력 파워를 갖고 있음을 알고 개인의 성공을 위해 정치적으로 편승하는 무리들도 계속 생겨나고 있다. 요즘 이 사회 관성을 다른 표현으로 레거시(legacy 유산)라고 하는데, 불의한 관성은 우리 후세들에게 물려줘서는 안 될 그릇된 유산일 것이다.


사회의 관성

관성?
물체가 밖의 힘을 받지 않는 한 정지 또는 등속도 운동의 상태를 지속하려는 성질. 보통 질량이 클수록 물체의 관성이 크다. (출처. 네이버 표준 국어 대사전)

우리가 불의한 관성에 맞서 타파하기 위해서는 사회 관성의 특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회의 관성은 물리학의 관성과 다르다. 첫째, 사회 관성의 크기, 즉 질량이 변한다는 특징이 있다. 일반적으로 질량은 물체 고유의 양으로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무형의 사회 관성은 지지하는 세력의 크기에 따라 관성의 크기가 변화한다. 따라서 우리는 '개혁'을 통해 질량을 줄이려고 애쓰고 있다. 둘째, 사회의 관성은 정의와 불의의 관성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어떻게 보면, '정의와 불의' 힘의 대결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아쉽게도 대부분의 조직은 시간이 경과될수록 초기 정신을 잃으며, 그 사이를 이기적 탐심이 차지하며 불의한 관성의 크기가 더 커지게 된다. 

이 조직의 관성을 경계하는 아마존만의 전략이 있다. 아마존의 창업자 제프 베조스는 ‘Day1정신’을 직원들에게 강조한다. 그 이유는 아마존의 초심이라고 할 수 있는 사명 ‘세상에서 가장 고객 중심인 회사’를 올곧게 지키기 위한 전략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20여 년이나 흘렀지만 어느 회사보다도 유독 ‘사명과 14개의 리더십 원칙’이 여전히 잘 지켜지고 있는 기업으로 모범이 되고 있다.


자기 정화 (self-purification)

우리는 사회의 관성, 조직의 관성을 바꾼다라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현재와 과거를 통해 익히 잘 알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검찰개혁, 그리고 80년대 독재에 맞서 자유를 되찾았을 때, 기존 관성의 저항에 맞서 더 큰 힘이 투입되어야만 했었다. 그렇다면, 기존의 불의한 관성을 바꾸는데 더 합리적인 방법은 없을까? 여기 불의한 관성의 질량을 스스로 낮춰 효과적으로 개혁에 성공한 사례가 있어 나누고자 한다.

“여보, 내일 담임선생님 뵈러 가는데, 봉투에 상품권 얼마를 넣을까?”

내 첫째 아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일이다. 어느 날 와이프가 내일 학교에 담임 선생님을 만나러 가는데 ‘촌지’에 대해 상의해왔다.

“여보, 내일 담임선생님 뵈러 가는데, 봉투에 상품권 얼마를 넣을까?”

“아… 촌지…  상품권으로 드리려고? “

나도 모르게 옛 기억이 소환되었다. 내 학창 시절엔 촌지가 만연되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직접 부모 입장이 되어보니, 그 당시 가정형편이 어려워 촌지를 드릴 수 없었던 친구나 그의 어머니 마음이 오버랩되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약간의 껄끄러운 마음이 있었지만, 선생님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담아 준비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저녁 학교를 다녀온 와이프에게 물어보았다. 선생님에게 촌지를 잘 전달하였는지….

 “안 받으시던데. 그리고 다음부터 이런 거 안 주셔도 된다고…. 요즘 젊은 선생님들은 다른 것 같아.”

그리고 다음 해 2학년이 되어서 다른 담임 선생님을 뵈러 갈 때도 촌지를 준비했었다. 왜냐면, 그때는 김영란법 생기기 전이었는데, 선생님 성향에 따라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동일하게 촌지를 거절하셨다. 그 이후, 우리 부부는 젊은 선생님들 중심으로 촌지를 거부하는 움직임이 서서히 확산되고 있다는 것을 체감하게 되었으며, 더 이상 봉투를 준비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학교 방문 시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 마음과 껄끄러운 마음이 공존했던 그 부분에 고마운 마음 하나만 남게 되었다.

 

선생님들 세계에서 '촌지'라는 오래된 관성이 어떠한 사회적 잡음도 없이 빠르게 없어질 수 있었던 근본 원인은 젊은 선생님들 중심으로 나타난 ‘거부’의 움직임, 즉 옳음과 그름을 분별하고 스스로 굽은 길로 가지 않는 ‘자기 정화’ 노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자정적인 움직임은 불의한 관성의 크기를 스스로 줄였으며, 이런 상황에서 도입된 김영란법은 토네이도가 되어 불의를 아예 뽑아버렸다. 결국 자기 정화 노력과 법이 조화를 이루어 빠르게 정의가 세워질 수 있었던 좋은 사례였다. 

이 사례는 우리 사회에 큰 교훈을 준다. 지금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검찰개혁, 부동산 투기 문제는 법, 제도만으로는 기존 불의한 관성의 크기를 줄이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저항만 분열만 더 커질 뿐이다. 사회 구성원 스스로 선과 악을 분별하여 '자기 정화' 노력이 수반될 때, 진정한 개혁이 이뤄지며 soft-landing 될 수 있을 것이다. 


창조주는 세상에 다양한 악한 신들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아시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도록 우리 인간들에게 ‘양심’을 선물로 주셨다. 옛날 인디언들은 이 양심을 '마음 안에 있는 삼각형'이라고 이야기하였는데, 매우 위트 있는 비유였다. 왜냐면, 죄책감이 드는 일이라면, 삼각형이 돌면서 찔림으로 신호를 주고, 불의한 일을 계속하는 사람의 양심은 삼각형 모서리 끝이 무뎌져 찔림을 못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 정화’를 위해 중요한 것은 양심의 모서리를 늘 날카롭게 관리해야 한다. 그리고 찔림이 조금이라도 들었다면, 바로 ‘외면’하는 것이다. 그때 불의한 관성의 크기, 질량은 줄어들기 시작할 것이다. 


정의 vs. 불의

2장에서 공의, 3장에서 불의에 대해 나누어 보았다. 그 본질과 핵심은 매우 심플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정의, 불의 개념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하지 못해 불의한 세상으로 만드는데, 영향을 끼친다면, 차라리 몰랐던 것이 더 나았을지 모른다. 성경엔 정의의 길에서 자꾸 벗어나는 우리들에게 당시의 속담으로 권면하고 있다.

"개는 자기가 토한 것을 도로 먹는다." 그리고 "돼지는 몸을 씻고 나서, 다시 진창에 뒹군다." (벧후 2:22)


우리가 사는 이 땅을 재건, 새롭게 재창조(recreation) 하기 위해 다짐해야 하는 첫 번째는 ‘불의한 길로 다시 가지 않겠노라’고 결심하는 것이다. 불의한 곳에서 나부터 스스로 빠져나와야 한다. 한번 빠져나왔으면 철저히 외면해야 한다. 그리고 새롭게 재창조된 첫날(Day1)이라고 외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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