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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임스 리 Nov 18. 2021

Company 안에 company가 없다

Extra mile

우린 살면서 누군가로부터 예상치 못한 선물 또는 도움을 받게 되면, 깜짝 놀라게 된다. 이 신선한 놀라움은 우리의 삶에 큰 활력이 되며, 이것은 ‘Extra(가외의, 추가의)’가 지니고 있는 마법의 힘일 것이다.

이 마법에 대해 2천 년 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가 억지로 오리(1 mile)를 가자고 하면 십리(2 mile)를 동행해 주어라(마태복음 5:41)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베풂의 크기를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extra size는 두배가 된다. ‘이왕 베풀 거 통 크게 베풀어라’는 말씀으로 들릴 수 있지만, 예수님은 부탁을 청하는 사람의 상황을 정확히 읽고 계셨다. 그는 미안한 마음에 어렵게 1마일을 부탁한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어서 ‘동행’이란 단어를 쓰셨다. 동행은 함께 길을 걸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힘든 상황에 놓인 이웃에게 립서비스(lip service)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서서 행동으로 도와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삶이 힘든 이유는 외로움이다. 어려운 상황에서 나 혼자 밖에 없다는 마음이 든다면, 절망의 마음은 더 클 수밖에 없다. 반대로 내 옆에 뜻을 같이 하는 이가 있다면, 그 상황을 이겨내는데 큰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도움을 받은 사람은 그 사랑을 간직하며, ‘나 또한 누군가에게 베풀리라’ 다짐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extra 마법의 또 다른 효과는 사랑의 기운으로 전환되어 공동체 안에 퍼져 나가는 데 있다.

하지만, 요즘 extra 마법은 쇼핑몰의 마케팅 수단(예. 1+1 이벤트 등)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2013년 미국 오바마 정부의 국립 건축과학원 이사를 역임하셨고 건축설계회사 ‘팀하스' CEO인 하형록 님은 그의 저서 ‘P31’에서 extra mile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아주 쉽게 설명하셨다.

예를 들어 애인이 “커피가 마시고 싶은데 커피 한 잔 사다 줄래?” 했을 때 어떤 사람은 정말 커피만 사다 줍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커피와 같이 먹을 수 있는 쿠키도 사다 줍니다. 엑스트라 마일은 바로 쿠키인 것입니다.

남자 친구의 재치 있는 행동에 여자 친구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만약, 여자 친구가 말한 그대로 받아들여 행동하였다면 '쿠키'라는 아이디어에 접근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extra mile은 여자 친구가 처한 상황과 마음을 읽고, 내가 갖고 있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결합될 때, 비로소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한 가지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내 긍정적인 에너지를 여러분의 이웃에게 나누어 줄 마음의 준비가 되어 계신가요?”

Company 안에 company가 없다

함께 모여 일하는 단체, 회사를 뜻하는 company는 원래 'com(함께)'+'pane(빵)'+'ia(먹는 것)'가 합쳐진 말이다. 우리말의 ‘한솥밥 먹는 사이'라는 의미처럼 정이 넘치는 단어이다. 그리고 이 의미 외에 동료, 친구, 친교의 뜻도 갖고 있다. 하지만, 요즘 일터에서 이 단어의 중의적 의미는 퇴색되고 있다.

 

여러 팀들이 모이는 회의 자리에 가보면, 참석자들은 마치 칼을 들고 나타난 정육점 아저씨 같은 모습이다. (쿠키를 마음에 담고 온 따듯한 모습이 절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팀 미션 및 KPI(key performance indicator)에 부합되는 일이 아니면, 냉정하게 자른다. 마음속엔 ‘까짓 거 하면 할 수 있는 일인데…’라는 생각이 들지만, 정색하며 “이 일은 우리 팀 업무가 아닙니다.”, “사람을 주시면 할게요.”, “개발 요구사항을 그쪽에서 다 정의해 주셔야 해요.” 등 선배한테 배워온 관성대로 의례적으로 재단해 버린다. 회의 분위기는 냉기가 흐르며, 주관자는 어쩔 줄 몰라한다. 결국 회의를 요청한 실무자는 회사(company) 안에 나와 동행해 줄 진정한 동료(company)가 없다는 차가운 현실을 다시 한번 경험하며 스트레스는 커져만 간다. 하지만 모순된 현실은 차갑게 거절한 다른 팀의 실무자도 책상으로 돌아가면 누군가에게 업무 협조 요청 메일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 역시 진정한 동료가 없는 현실에 스트레스받는 것은 똑같다. 결국 사일로 현상*, 즉 조직 이기주의 폐해는 우리 모두에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Company 안에 company가 없는 모순된 현실 속에 갇혀 사는 우리들모습은 과연 영장류 동물이 맞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안타깝기만 하다.

*사일로(Silo) 현상 : 사일로는 미국 곡물 창고를 뜻하는 단어로써 창고 간 연결 통로 없이 우뚝 솟은 모습이 마치 조직 이기주의를 연상케 하여 붙여졌다.

곡물창고 사일로(silo)


선한 영향력

문제의 본질은 ‘이타심의 결여’이다.

여러분은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현재 이기주의라는 사회적 큰 물줄기를 어떻게 이타주의로 돌릴 수 있단 말이에요. 그건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맞다. 사람의 마음을 되돌리는 일, 어려운 일이며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포기하기엔 우리 공동체에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이기에 포기하기엔 이르다. 왜냐면 우리 모두는 사회생활을 하고 있으며, 누군가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들이기에…. 과연, 해법은 없는 것일까?


팬데믹이라는 사상 초유의 상황 속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한 가지 단초, 한 줄기 빛을 발견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팬데믹이라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을 되찾아 가고 있었으며, 이것은 가외적인 행동, 즉 extra mile로  나타나고 있었다. 여전히 이기적인 탐욕의 냄새가 자욱한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지만, 공동체 속에서 옳은 일, 정의를 행하려는 의로운 자들의 움직임은 우리 사회에 한 줄기 빛으로 다가왔다.

* 돈쭐 캠페인 : 코로나로 매출이 줄어 심각한 경영 난을 겪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어려운 가정환경의 청소년들에게 치킨이나 피자 등을 무료로 대접한 음식점 사장님들이 있었다. 이들의 선행을 뒤늦게 안 시민들은 사장님들을 혼쭐이 아닌 돈쭐을 맞게 해 드리자며, 해당 매장의 상품을 적극적으로 구입하며 나섰다. (어떤 고객은 가게에서 배달이 안 되는 먼 지역에 살면서 온라인 주문 메모에 이렇게 남겼다. ‘그 청소년이 오면, 이 돈으로 꼭 대접해 주세요. 저도 사장님의 선행에 동참하고 싶어요….’ )
* 착한 건물주 캠페인 : 코로나로 인해 자영업자들이 힘들어지자 임대료를 깎아주는 착한 건물주들이 등장하였다. (착한 건물주들이 확산되자 정부도 임대료 인하분의 50%를 부담하는 정책을 긴급 제정하였다.)
* 묘목 캠페인 :  6.25 전쟁 참전국이자 우방 국가인 터어키에서 아주 큰 산불이 일어났다. 마침 2020 도쿄 올림픽 기간 중이었는데, 터어키 여자 배구선수들은 실의에 빠져있는 국민들에게 승리로써 기쁨을 전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4강전에서 그만 좌절되고 말았다. 이 선수들의 눈물을 본, 한국 네티즌들은 우리가 터어키 국민들에게 힘을 보태주자며 스스로 아이디어를 내며 자발적인 묘목 기부 캠페인으로 발전시켰다.

그동안 우리는 이기주의가 팽배한 사회 속에 살면서 이타심은 소멸되어가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껴왔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타심은 우리들 마음속에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우리들의 선행을 오랫동안 기다려온 것처럼 그 마음은 폭발하였다. 누가 시키는 사람이 없는데도 스스로 해당 게시글에 '좋아요'를 클릭하고 지인들에게  퍼트리고 동참하였다. 이는 우리 모두가 무언가에 이끌리듯 자발적으로 일어난 현상이었다. 마음의 릴레이(relay of hearts)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타고 빠르게 큰 파도를 만들어 내었다. 이 이타적인 캠페인 효과는 지금까지 대기업들이 펼친 수많은 마케팅 캠페인-TV 및 인터넷 광고, 신문 홍보 등 많은 자원을 투입시킨-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럼, 위 캠페인 사례를 통해 우리 마음속 이타심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첫째, 무엇이 우리의 이타적인 마음을 일깨운 것일까? 그 핵심은 무엇일까? 위 자발적 캠페인들의 공통점, 본질엔 선(善, good)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리의 '마음'에게 선과 악을 판단하는 임무를 맡기셨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의 언행 속에서 수시로 위선(僞善)진선(眞善) 분별하고 있다. 이 선과 악, 진선과 위선을 구분하는 마음의 기준은 옳은 일 여부이다. 우린 이것을 정의(正義)라고 부른다. 그리고 한 발짝 더 나아가 공동체를 생각하는 따듯한 마음, 사랑이 담긴 정의를 공의(righteousness)라고 부른다.

이 사례들을 통해 인간의 이타적인 마음의 시작점은 선(善, good)에서 출발다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선한 일은 우리의 의협심을 유발한다. 공동체 일원의 한 사람으로서 공의를 위한 나의 역할을, 옳은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든다. 따라서 위 이타적 캠페인들의 선한 의도는 우리들을 정의로운 인간으로 만들어 주었으며, 자발적인 마음의 릴레이(relay of hearts)로 연결되어 사회에 아주 커다란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된 것이다. 반면, 우리 인간은 옳지 않은 일 앞에서는 마음 여는 것을 주저하게 되거나 형식적으로 대응하기 마련이다. 아니면, 양심이 이미 무뎌져 공의와 불의를 분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으니 조심하자. 

둘째, 우리들의 수준이 높아지고 있음에 주목하자.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는 한국의 착한 건물주 캠페인은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준 매우 고무적인 사례였다고 말하였다. 또한 마케팅 교수들은 근로자의 수준이 매우 높아지고 있음을 경영진들에게 강조하고 있다. 예전 화이트 컬러, 블루 컬러 구분 짓던 시절의 관료주의 문화를 빨리 청산하고 모든 근로자들이 일터에서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조직문화를 혁신하는 것이 DX시대 살아남을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따라서 조직 문화 혁신 활동은 외형적인 개선(옷차림, 호칭, 보고서 등)에서 벗어나 본질에 더욱 집중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우직하게 (Be honest foolish)

그럼 왜 Company 안에 협동이 잘 이루어지지 못하며, 진정한 동료가 없는 것일까? 이 문제의 접근을 위해 아래와 같이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과연 우리들이 추구하는 활동들은 선한 의도를 갖고 있는가? 그리고 그 의도는 진선(眞善)인가, 위선(僞善)인가?

의도는 ‘속 마음’을 뜻한다. 따라서 내가 몸 담고 일하고 있는 조직은 어떤 속 마음을 갖고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지 냉정하게 살펴봐야 한다. 선한 의도인가, 아니면 선한 척만 하고 탐심에 젖어 있는가, 아니면, 대놓고 조직 구성원들에게 탐심을 부추기는가?


우리 사회의 몇몇 조직들을 예시적으로 살펴보자. 정당의 활동은 진선인가, 위선인가? 국민들 중, 국회의원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본 사람은 매우 소수이다. 하지만 국민들은 안다. 위선용 언론 플레이인지, 아닌지를…. 제대로 만나본 적이 없는 국민도 아는데, 하물며 그 정당에서 국회의원과 함께 일하는 당직자들은 진선인지, 위선인지 모를까? 기업도 마찬가지이다. 요즘 고객 만족, 고객 가치를 이야기하지 않는 기업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직원들은 알 것이다. CEO를 비롯한 경영진의 언행이 진선인지, 위선인지…. 그리고 거기에 정치적으로 편승하여 행동하는 동료는 누구인지까지도…. 외 학교, 병원, 교회 등 추구하는 활동의 의도 진선일까, 위선일까?

결국, 구성원들의 마음이 이타적이지 못한 것은 조직의 의도가 진선(眞善)이지 않기 때문에 이기적인 얕은 행동들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요즘 구성원들은 점점 급여받은 만큼만 일해야겠다는 사고에 젖어 가고 있으며 나도 모르게 편협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직을 위한, 동료를 위한 진정 어린 가외적인 행동, 즉 extra mile과 같은 동행이 나오기 힘든 것이다.


이 문제를 아래와 같은 도식으로 정리해 보았다.

대부분 조직의 지향점, 홈페이지에 소개된 비전과 사명은 선하다. 하지만, 그 지향점을 실천함에 있어서 진정성 있게 우직하게 실천하는 조직이나 개인은 매우 드물다. 핵심은 ‘우직함'에 있다. 우직(愚直)이란 단어의 우는 한자로 '어리석을 우'이다. 다시 말해 남들에게 바보로 비칠 정도로 아주 정직하게 수행한다는 의미이다. 우린 남들에게 똑똑하게 보이기 위해 애를 쓴다. 바보로 보이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하지만, 적어도 선(good), 옳은 일(righteousness)에 있어서 만큼은 바보가 되어야 한다. 특히, 조직의 리더는 이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 왜냐면, 조직에 속한 구성원 전체를 불의한 집단으로 또는 의로운 집단으로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리더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1964년 설립되어 오랜 시간 국민의 건강을 책임져온 남양유업은 정의롭지 못한 연속된 마케팅 사고들로 인해 한 순간 불의한 집단이 되어 버렸다. 대리점 갑질 사태, 경쟁사 제품 비방 광고, 자사 유제품 불가리스가 코로나19 면역효과가 있다고 과장 광고에 이르기까지 등. 과연 이 조직에 몸 담고 있는 구성원과 그 가족은 회사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까? 반대로 1926년 창립된 유한양행은 여전히 국민들로 칭송받는 기업으로 존립되고 있다. 이 두 회사의 홈페이지에 소개된 지향점은 모두 선하다. 하지만, 회사 내부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 일? 그리고 그 결과는…. 결국 신뢰를 잃은 남양유업의 경영진은 회복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기업 매각을 결정하였다. 반면, 유한양행은 가장 존경받는 기업 제약부문 1위로 18년 연속 선정* 중이다. (*출처. 한국능률협회)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세상에서 많은 이들이 우직을 외면하고 쉽고 빠른 길만을 찾는다. 비록 우직함의 길은 힘들지만, 롱런할 수 있다. 두터운 고객의 사랑과 신뢰 속에서...

두 기업의 지향점 비교 - 기업 이념의 차이는 없다. 다만, 차이는 이념의 실천, 우직함에서 나타난다.


볼록 렌즈와 오목 렌즈

어렸을 때, 나의 첫 번째 과학 실험은 돋보기로 햇빛을 모아 종이를 태우는 실험이었던 것 같다. 그 실험의 좋은 점은 학교 과학실이 아니더래도 돋보기만 있으면 동네 어디서든지 할 수 있었다. 햇볕 좋은 날 마른 낙엽을 바닥에 깔고 돋보기에 햇빛을 통과시키면, 햇빛이 하나로 모아져 금세 그을음 향을 내며 낙엽이 타기 시작한다. 하지만 오목렌즈는 2분, 3분… 5분이 지나도 종이를 태울 수 없었다.


이 돋보기 실험을 우리 사회에 대입해 보면, 태양은 조직의 지향점(비전, 사명)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돋보기는 지향을 대하는 리더의 마음, 진선(眞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비로소 구성원들의 분산된 마음은 한 마음이 될 수 있으며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존경받는 Company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구성원들은 자연스럽게 조직을 위한 협동, 동료를 위한 진정 어린 이타적인 행동(Extra mile)들이 표출될 것이다. 반대로 지향을 대하는 리더의 태도가 이익에 따라 진선과 위선을 오락가락한다면, 구성원들의 마음은 분산되어 이기적인 집단으로 남게 될 것이다. 오목렌즈처럼….


나의 바람은 Company(조직) 안에 진정으로 함께 일할 company(동료)들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지향을 말뿐이 아닌, 진선으로 우직하게 실천하길 소망해 본다. 그럼, 우리의 일터는 보람되고 즐거워질 것이다. 일터가 보람되고 즐거워진다면, 우리의 삶도 한 층 더 행복해지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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