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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환 Sep 01. 2020

수치심이 아니라,

 휘루는 이제 그 일을 웃으면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가끔 그 일을 생각하면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은 아직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휘루는 학교폭력자치위원회를 열었다. 지금 생각하면 별일이지만, 그때의 휘루는 별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휘루는 공부 잘하는 회장이었고, 친구도 많았다. 부회장이었던 휘루의 단짝 친구가 항상 휘루와 함께 했고, 휘루의 뜻에 동조하는 친구들도 많았을뿐더러 그 외에 얄팍한 관계도 많았다. 남자애들로만 가득한 반에서도 휘루는 그렇게 무력한 아이가 아니었고, 게다가 담임선생님도 온전히 휘루 편이었다. 그래서 휘루에게 학폭위를 열겠다는 결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내 옆에 얘, 그리고 쟤, 걔한테까지도 피해를 끼치는 사람한테 벌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휘루는 무너져내린다.

    

 휘루가 고발하기로 한 그 애는 학급 내에서 권력의 중심이었다. 그 애는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가서 갚지 않기도 했고, 악의적인 욕설과 비난, 조롱을 하는 것을 즐겼다. 친구들의 목을 조르며 낄낄대는 걸 좋아했고, 위협적인 태도로 상대방을 주눅들게 하면서 즐거워했다. 그러면서도 선생님들에게는 까불거리며 분위기를 즐겁게 만드는 애쯤으로 인식될 수 있게끔 행동하는 게 아주 영악한 애였다. 그 애를 알아채고 행동을 취해야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회장이었던 휘루와 부회장이었던 단짝 친구, 그리고 젊은 담임선생님이다. 담임선생님은 휘루와 친구를 따로 불러 다른 친구들에게 있었던 일들이 사실인지, 그리고 휘루에게는 별일이 없었는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이 작은 회동의 주인공들은 이 일이 작은 일이 아니라는 데에 의견을 모으고, 자료를 모아 학폭위를 열자고 결심한다. 하지만 휘루에게는 이때까지 선생님께 숨긴 것이 있었다. 그 애가 휘루에게 어떻게 행동했는지, 아직 선생님께서는 모르고 계신다. 그리고 휘루의 친구도 어쩐지 그 일을 말하지 않는다. 휘루도 친구도 사전에 그러자고 한 적은 없었지만, 그 이야기에는 보이지 않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휘루는 같은 반 친구들보다도 다른 반의 여자친구들과 더 친했고, 목소리가 높고 수다 떨기 좋아하며 성격도 둥글 외모도 둥그런 아이였다. 보통 이런 애들은 남자 반에서 ‘여성스럽다’는 말을 자주 듣곤 하는데, 휘루가 딱 그런 아이이다. 지정 성별 남성인 휘루이지만, 반에서의 휘루는 ‘남성’이 아니었다. 문제는 지정 성별을 기준으로 분반을 나누는 고등학교에서 남자 반의 몇몇 아이들은 어떻게든 성욕을 풀고 싶어 안달이 나 있다는 것이었다. 애인이 있든 없든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교실에서까지도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 대상화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 대상이 누구겠는가. ‘남성’이 아닌 사람. 그중에는 휘루가 포함되어 있었고, 그 애의 표적이 안타깝게도 휘루였다.

 처음에는 팔이나 다리. 친한 반 친구들끼리 으레 했던 정도의 스킨십이었다. 다만 휘루는 그 애와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래도 휘루는 ‘그냥 친해지고 싶은가?’ 생각하고 넘기기로 한다. 어느 날, 그 애는 휘루가 단짝 친구와 꼭 붙어 있거나 다른 반 친구와 스킨십 하는 것을 흘겨보기 시작했다. 이때쯤 휘루는 그 애가 관계에서 권력을 쥐고 싶어하고, 그 권력을 악의적으로 이용하는 사람임을 눈치챘다. 그래서 그 애를 피하기 시작했고, 그게 그 애를 더 자극해버릴 줄은 몰랐다. 휘루의 반팔 셔츠 하복 안으로 손이 들어왔다. 교실에는 사람이 꽤나 많았고, 휘루는 반 친구들과 대화 중이었다. 셔츠 안을 휘적거리면서 피식 웃고 가는 그 애를 친구들도 휘루도 모르는 척했다. 그 애는 점점 더 대담해졌고, 휘루의 셔츠 안에 손을 넣고 입을 맞춰왔다. 수학여행을 가기 전날, 종례가 끝난 교실에서 휘루에게 따먹힐 준비를 하라고 낄낄대며 소리치기도 했다.     

 

 휘루는 혼란스럽다. 휘루에게 닥친 상황은 휘루가 본인이 겪은 일들과 감정을 언어화하고 이해할 겨를조차 주지 않았다. 친구들 앞에서도, 그 애 앞에서도 태연하게 행동하는 데에 급급했던 휘루는, 회피할 수 없었던 그 낯선 감각들에 적응하기로 했다. 이제, 휘루의 여자친구들이 등장할 차례. 휘루가 겪은 사건들과 감정을 알게 된 여자친구들은 휘루의 말문이 트이도록 도와준다. 그거 ‘성추행’ 아니냐며 휘루보다도 더 분노하는 친구들의 말을 가만히 들으면서, 휘루는 머리를 긁적이기만 했지만, 사실 이때 휘루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아, 이게 내가 적응할 일이 아니구나.’

 여자친구들의 도움에 힘입어 휘루의 말문도 트였고, 자기가 당한 일도 학폭위의 안건에 추가하겠노라고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렸다.

 그 뒤로 매일매일 폭풍 같은 나날이 이어졌다. 휘루와 친구는 담임선생님의 지휘하에 자기들이 당한 일, 다른 친구들이 당한 일을 기록한 아카이브를 만들기로 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에서 ‘수치’라는 말이 놓일 자리는 없다. 휘루는 한 번도 자기가 당한 일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고, 그가 느낀 감정을 수치스러움으로 언어화한 적도 없었다. 휘루 앞에 ‘수치’라는 말이 턱 하니 놓였던 건, 자치위원회 위원들은 원탁에, 휘루와 휘루의 엄마는 원탁과 조금 떨어진 곳에 나란히 놓인 작은 의자에 앉아 있었을 때가 처음이었다.   

   

 학교폭력자치위원회의 위원은 자치부 선생님들, 학부모 위원들, 학교전담 경찰을 합해 총 6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원탁으로부터 휘루와 엄마가 앉은 작은 의자에 시선이 꽂혔고, 질문이 시작됐다.

 “왜 친구가 네 몸을 만지는데 하지 말라고도 안 했어?”

 “왜 가만히 있었던 건데? 수치스럽지도 않았니?“

 ”어머니께서는 아들이 그런 일을 당했는데, 신고도 안하고 뭐하셨어요?“

 여태 의연하던 휘루의 목이 메어오기 시작했다. 옆에 있는 엄마는 화를 냈다.

 ”저기요. 지금 그게, 당신들이 할 말이에요? 애 데려다놓고 뭐하는 거에요?“

 ”어머니, 흥분하지 마세요. 저희가 뭐 틀린 말 합니까?“

 ”저희가 다 안타까워서 그러죠, 안타까워서.“

 휘루는 눈물 때문에 흐릿해진 시야 너머로 낄낄대면서 원탁에 앉아 있는 그 애를 바라본다. 하나도 아니고 여섯씩이나 앉아 있는 그 애들은 화를 내는 엄마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엄마는 울고 있는 휘루를 그냥 데리고 나가버렸다. 작은 의자가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고, 밖에서 대기하던 담임선생님은 달려와 분을 삭이지 못하던 엄마를 달랬다. 울음을 그친 휘루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르던 휘루는 자기가 친구와 만들었던 아카이브는 어디에 갔는지 궁금해졌다. 자기가 왜 다그침을 당해야 했는지, 왜 엄마는 그런 말을 들어야 했는지 휘루는 알 수가 없었다. 또 그 자리에 왜 자기만 벌거벗겨진 채로 있어야 했는지, 휘루는 도저히 이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수치스러웠던 적 없는데. 그냥 조금 무서웠고, 화가 났을 뿐이었는데.’

 휘루는 그전까지 수치스러움을 느낀 적이 전혀 없었지만, 엄마의 손에 붙들려 원탁이 놓인 방을 빠져나온 뒤로부터 수치스러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휘루 앞에 놓여 있었던 ‘수치’라는 말은, 휘루에게 수치스러움의 감각을 일깨워주었다. 그 공간에서 자기와 엄마가 여섯 명의 가해자의 과녁이었다는 것, 교실에 가면 그 애를 또 봐야 한다는 것, 학교에서 나는 공공연하게 ‘성추행 피해자’가 되었다는 것에 휘루는 수치스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수치스러움의 홍수 속에서, 그 애가 닿았을 때의 낯선 감각이 되살아났다. 언어화하지 못했던 감각이 타인에 의해 ‘성적 수치심’으로 명명된 이후로, 휘루의 무의식은 끝내 그 감각에 그 이름을 붙여버렸다.    

  

 며칠 뒤, 휘루는 담임선생님으로부터 학폭위의 결과를 들을 수 있었다. 자필 사과와 자퇴 권고. 자필 사과가 무슨 소용이며, 자퇴 ‘권고’는 또 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따질 기력이 없어 그냥 알겠다고 대답했다. 담임선생님은 미안하다는 눈빛으로 휘루를 쳐다보았고, 그게 휘루에게 큰 위로는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수치스러움의 감각을 알아버린 휘루에게 선생님의 미안한 눈빛은 오히려 수치스러움을 느끼게 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학폭위가 어느 정도 효력이 있었다. 그 애는 반에서 권력을 잃었다. 반 아이들은 권력자는 무서워했지만, ‘학교폭력 가해자’는 무서워하지 않았다. 반은 어수선했으나 권력자는 권력을 잃고 비실대고 있었고, 휘루의 반 친구들은 여전히 휘루의 친구들이었다. 하지만 휘루는 대상화의 공포를 알게 되었다. 또 성적 수치심으로 이름 붙은 감각을 알게 되었고, 이런 감각들은 휘루의 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도 휘루는 밝은 아이였고, 친구가 많았다. 정말 다행히도 여자친구들이 많았다. 휘루는 여느 때처럼 여자친구들에게 자기가 겪은 일들을 이야기했다. 친구들은 이번에도 휘루와 함께 화내주었다. 그리고 그 친구들은 또, 다행히도 욕을 무지 잘하는 친구들이었다. 친구들이 분노에 차서 내뱉는 쌍욕을 들으면서 휘루는 울면서도 웃을 수 있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휘루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자신이 겪었던 감각을 친구들이 이미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이상한 게 아니라 이 사회가 그런 사회임을, 휘루는 여자친구들의 말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여자친구들이 이야기해주는 감각과 경험들은 ‘대상’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게 했고, 자신의 경험을 ‘수치’로 정의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또한 그들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휘루와 친구들은 그렇게 서로의 감각을 껴안고 그 감각이 시커먼 덩어리가 되지 않게 싸웠다.



P.S. 그리고 나는 얼마 전, “성적 수치심, 안 느꼈는데요? ‘성적 빡치심’을 느꼈어요”라는 제목의 한겨레 일보 기사를 보았다. 그리고 욕을 엄청 잘하는 내 소중한 친구들이 있는 톡방에 기사 링크를 공유하며 덧붙였다.

 “내가 그때 이렇게 말했어야 했는데 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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