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그대가 필요해

[인생 복습 ⑩] 실버타운 -공동체

by 이창우




노래로 마음을 전하고 그 노래를 들으며 누군가의 마음을 받는다는 일은 참으로 멋진 일이야. 이런 사람도 있지. 글로 마음을 나누고 예술 작품으로 자신의 마음을 내보이는 거 말이지. 어떤 방법으로든 자기 마음을 누군가 받아줄 수 있는 시간이 많다면 삶은 꽤 근사해지기도 한다.


사회 복지 용어 사전에 의하면 ‘실버타운’이라는 단어는 흰 머리카락을 비유하여 노인들과 관련된 산업을 표현하기 위하여 일본에서 만든 실버산업의 ‘실버’와 영어 단어 ‘타운’을 합성한 것으로, 비슷한 개념의 유료 노인주거시설이다.


실버타운은 사회생활에서 은퇴한 고령자들이 집단적 또는 단독적으로 거주할 수 있도록 노인들에게 필요한 주거 및 서비스 기능을 갖춘 노인주거단지이다. 고령화 사회의 도래로 고령자를 위한 주거 수요의 증가와 함께 생겨나 각종 휴양 · 여가 시설, 노인용 병원, 커뮤니티 센터 등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서비스 기능의 시설이 갖추어진 곳을 말한다.


꽤 이상적이다. 이누도 잇신 감독의 <시니 바나>의 ‘장수원’이 용어 사전의 개념을 그대로 보여 준다. 입주하는데 엄청난 돈이 있어야만 한다는 전제 조건만 없다면 노인들의 천국으로 불릴만하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이청준의 소설 제목처럼 떠오른다. 나 역시 노인들의 천국에서 살아갈 당신들이 될 수 없기에 되돌아보는 시간일지도.


영화야 그 안에서 일어나는 노인의 삶에서 만나는 갈망과 나이 듦이 젊음과 별반 다를 것도 없다는 생각을 던져 주려 애쓰지만, 그것 또한 수명에 대한 기대심리의 연장선일 뿐인 거다. 누구나 갖고 있음 직한. 하지만 나는 실버타운에 다르게 접근하고 있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고 실현 가능성을 위해 여전히 오늘을 살아가는 것밖에는 달리 극성을 부릴만한 것은 아니다. 내겐 자연스러운 오늘의 연장선에 놓일 그때라는 것이니까.


내게 있어 현재의 공간 이동과 함께 펼쳐질 실버타운은 ‘타운’이 될 것은 아니기에 ‘실버하우스’로 바꾸어 불러야 적절할 듯하다. 물론 내 공간의 이름으로 붙이지는 않을 거지만. 우선은 주변 환경을 소개하면 가까운 곳에 성당이 있어야 한다. 노령의 입주자가 원하는 단 한 가지기에.


실버하우스에는 한 노인과 내가 살고 있다. 그 둘은 모녀지간이다. 그간의 사정이야 중요하지 않다. 그때 놓일 상황에 주목하는 게 이 글을 쓰는 이유이기에 지금부터는 상상력을 발휘해서 그때를 그려볼 수밖에 없다. 지극한 마음이면 가능한 것이 ‘상상하기’이니까.


한 노인의 바람이고 나는 그 바람을 가능하면 이루고 싶은 마음이기에. 뒤늦게 효녀가 된 것은 아니다. 나에게도 그런 환경이 필요하게 될지도 몰라 자연스레 다가오는 공감이다. 인생을 복습하고자 시작한 글이 어느새 예습이 된 것인가 싶겠지만 그렇지 않다.


오늘이 없으면 그때는 불가능하기에 오늘 이 시간이 그때는 복습하는 인생일 것이다. 그림 재주가 있다면 함께 그려나가도 좋을 것인데 비슷한 사진을 떠올리는 것에 만족해야겠다. 서울 토박이로 살다가 서울특별시를 탈출했으니까. 이국적이진 않아도 대도시와는 분명 다른 곳이었다. 짙은 새벽 고개를 뒤로 젖히면 하늘에서 별이 뚝 떨어질 것만 같은 곳이니까.



2010년 개봉한 마이클 호프먼 감독의 <톨스토이 마지막 인생>



이 영화에서 톨스토이 사상에 심취한 문학청년 발렌틴 불가코프는 톨스토이의 수제자인 ‘톨스토이 운동’을 주도하는 블라디미르 체르트코프에 의해 톨스토이의 개인 비서로 고용된다. 발렌틴이 톨스토이의 집에서 생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톨스토이는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 작품의 저작권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러자 평생 톨스토이를 내조해 온 톨스토이의 부인 소피야는 가족을 버리려는 (재산의 사회 환원을 그렇게 표현하는 거에서 드러나는 한 개인의 합리적인 욕망) 톨스토이의 결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분노한다.


“소피야는 남편의 선의를 무너트리려고 하지. 그 여자는 우리 일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 우린 톨스토이의 작품을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 배포하길 원할 뿐이야.”


영화에서 블라디미르의 말이다. 톨스토이의 부인 소피야의 가족에 대한 집착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 시대의 러시아에 여인은 한 가족의 구성원이기보다는 소도구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도구를 쓸모 있게 하는 ‘가족 공동체’를 버리려는 남편은 부당하다. 아니 비인간적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여인의 선택이 톨스토이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아내라는 이름으로 서 있었을 뿐이라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소피야는 기득권층이고 그녀는 이미 충분히 가진 부류이기 때문에 타자의 눈으로 보면 탐욕적인 백작 부인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이 자신의 신념에 반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물음에서 나는 그 해답을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끼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의 여주인공 베라와 그의 남편 로뿌호프, 끼르사나노프를 떠올리며 만난다. 베라와 두 남편은 이 영화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에서 보여주는 갈등에 해답을 건네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소설’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 가능성을 저자는 러시아의 사회에 이식시킬 수 있기를 부단하게 노력한 인물이었다.






그의 노력은 분명 러시아의 사회에 영향을 끼쳤음에는 틀림이 없다. 볼셰비키 혁명에서 그 후 러시아는 레닌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으로 변화했으니 말이다. 혁명은 완성되지 못했지만 소련의 해체라는 결과에만 매몰되지 않기를 바란다. 주목해야 할 것은 150여 년 전 시대의 사회 분위기가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시대와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체르니셰프스끼와 톨스토이는 1828년 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내기이기도 하지만 『무엇을 할 것인가』의 저자는 61세로 생을 마감하고 톨스토이는 82세의 장수를 누렸다. 살아있는 동안 그들이 서로 교류를 했는지는 나로선 알아내지 못했다. 추측건대 그 두 작가의 길은 확연하게 달랐지만, 그들이 지향하는 공공의 가치는 한 곳으로 모인다.


톨스토이는 그 시대를 누리는 기득권층의 백작 가문이며, 그의 아내는 ‘백작 부인’이라 불린다. 백작 부인은 남편의 신념을 이해하거나 기존의 사회질서(귀족들에게만 유리할 뿐인)에 반하는 사실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그 시대의 ‘아내’이고, ‘베라’는 비천한 집안의 예쁜 처녀이지만 자신의 환경에서 자유를 선택하여 누구의 아내가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함께 나누는 동반자로서의 ‘인간’이다.


나의 것을 공동체와 나눌 것인가, 나의 것을 지킬 것인가에 ‘사회 지식인’의 선택이 있는 것이고, 미래의 변화 가능성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기득권층의 자발적인 나눔의 시작은 위대한 사상가 톨스토이의 아내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그들의 변화를 기다리는 일보다 사회 다수의 개인이 삶의 변화를 위한 선택을 당당하게 할 수 있을 때 훨씬 자연스럽고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는 시작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이 추구했던 가치는 다르지 않았다. ‘공동체’를 통한 ‘선’을 향한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인데, 그 나아가는 시간에는 한 개인들의 사랑과 신념에서 어떤 선택으로 만들어진 결과로써 ‘희망’이 있었다.


영화 속에서 톨스토이를 경외의 대상으로 여기는 비서 발렌틴은 사랑과 신념이라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힘들어하는 톨스토이와 극심한 배신감을 느끼는 소피야 사이에서 큰 혼란을 겪는다. 자신이 믿고 있는 세계와 충돌하는 개인의 모습은 어느 시대에나 마찬가지 아닐까. 이런 갈등 속에서 톨스토이는 삶의 마지막을 혼자 조용히 지내고 싶다며 집을 나가게 되고 실제로 그는 기차역에서 죽음을 맞는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은 사랑에서 시작되었다. 세계의 모든 종교엔 공통된 진리가 있다. 단 하나의 진리, 그것은 사랑이다.



톨스토이 주의자들과 함께 러시아 대문호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인생의 마지막 1년의 세월이 이 영화의 내용이 되었다. 고전 문학작품만으로 그를 만났던 그의 사상에 공감대는 뜻밖에 많은 세계인의 영혼들과 교류가 이어지게 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근대 초기 우리의 역사에서 친일 성향의 신예 개화파가 톨스토이의 탈근대적 대안을 추상화하고 종교 화해서 병역 거부, 국가에 대한 불복종 호소와 같은 그의 정치·사회적 핵심 사상을 빼버린 것이다.’


라는 박노자의 말에서도 톨스토이를 만난다. 한국에서 톨스토이 핵심 사상은 실종된 채 그의 문학작품이 ‘교양인’들의 필독서로 자리 잡는데 그 몫을 다했을 뿐인 거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와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끼의 책은 지금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그동안 놓쳤던 새로운 시대의 가능성을 다시 만나게 해 준다.


21세기에 살면서도 여전히 친일 근대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관의 경계를 넘지 못하는 내 나라 지성의 역부족을 탓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것 또한 남은 자들의 선택으로 변화될 과제임은 분명하기에 기성세대의 성찰이 너무도 간절하다.



특히 톨스토이 주의의 가장 돋보이는 특색이었던 국가주의를 넘어선 비폭력 사상의 실천은 오히려 다른 나라의 다른 인물에 의해 더 조직적으로 전개되어 크나큰 결실을 낳았다. 그 조직은 하나의 신념을 같이하는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든 톨스토이 언들의 ‘공동체’의 역할이었다. 그의 노년에는 톨스토이의 사상과 신념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톨스토이 언들이 있다.


“한 인도인에게 흥미로운 편지를 받았다.”


1909년에 톨스토이는 영국의 식민지였던 남아프리카에서 인권 보호 활동을 벌이던 한 인도인 변호사가 보낸 편지를 처음 받았고, 이후 사망 직전까지 소식을 교환했다. 수년 뒤에 그 인도인은 고국으로 돌아가 톨스토이의 사상에서 힌트를 얻은 비폭력 투쟁 ‘샤티아 그라하(진리의 힘)’를 본격적으로 전개해 큰 반향을 일으킨다. 그의 이름은 마하트마 간디였다.


인류의 역사에서 한 사람이 미치는 영향은 시간의 흐름이 계속되는 동안은 그 힘의 파급이 인류사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일상에서 만나는 아주 작은 우연한 힘은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인류의 희망으로 번지고 있음을 믿게 된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은 행복하다. 그리고 그 사랑의 힘으로 모여진 작은 공동체들은 세계의 야만과 탐욕에서 비켜나 많은 이들이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일들을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위대한 진리의 시작이 나에게서 시작될 수 있다는 진실을 외면하고 있기에 끊임없는 불안과 자기기만, 불신의 늪에서 분노와 절망으로 허덕거리는 것은 아닐지.


자신을 파괴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임을 인식할 수만 있다면 내 곁의 그대를 충분히 사랑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그 한 걸음을 떼는 것이 아니겠나. 내 곁의 사랑스러운 ‘그대’가 함께 우리의 사랑을 나누는 모두로 행복하기 위해 살아가는 시간을 가슴에 품는다면 이 세계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 향기로움과 달콤함에 현기증이 날 것만 같다.


톨스토이 주의, 톨스토이 언, 이념적 아나키스트, 그 외 어떤 것으로 굳이 분류하거나 구분될 수 없는 것은 ‘인간’ 그리고 ‘사랑’ 그 두 가지에 더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 자기만족을 우선으로 살아온 개인주의자인 나로서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도 온갖 자신들만의 이해관계와 합리적이라 불리는 신자유주의로 삶을 파괴하는 이들을 지켜봐야 하는 현실을 건너뛸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한 개인으로 선택할 수 있는 더 나은 삶의 시작은 가치 지향의 공감대로 형성된 자발적인 작은 공동체의 움직임에서 비롯될 수 있지 않을까. 기존의 잘못된 힘의 남용에 끌려가지 않을, 혼자는 너무 힘들다. 함께, 둘이면 조금 나을 것이고 셋이면 더 낫겠지. 하나가 망가지면 혼자만 남게 되지는 않을 거니까.



굳이 말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그것은 위대한 비밀이며 다만,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라고.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기술 도 필요 없으며 오로지 순수한 마음과 정신, 그리고 인간에 대한 존엄성과 자유에 대한 의식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그 이상의 비밀은 없다.



『무엇을 할 것인가』의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끼의 말을 옮기며 젊은이들과 함께할 실버타운이 활기 넘치는 공동체로 자연스럽게 열릴 그 날을 마음에 품고 10편의 [인생 복습]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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