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학교는 불행한가

전성은/메디치

by 이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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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을 덮고 한참을 물끄러미 있어야 했다.

늘 생각하던 것들.

그것들이 한 권의 책으로 정리 못한 내 생각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이었다.

교육의 진정한 목적을 기억해 내고 보편화되기까지는 너무 먼 이야기 같기만 하다.


그.러.나.


이런 학교가 이 땅에 온갖 핍박과 위기를 넘기며 1956년부터 존재해 왔다.

그것이 바로 이 땅에 희망을 건넨다.


私學은 권력에 장단을 맞춰야 하는 국공립학교의 대안이어야 했다.

그렇게 되었을 때 교육의 정의가 살아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학교가 이익집단으로 변질된 우리들의 대한민국에서 바로 교육인재양성의 서글픔을 만난다.


사명감과 같은 소명의식이 적어도 교육자에게는 필요한 것인데 그렇게 나아가지 못한 직장 개념으로 전락해버린 교육 현실이 씁쓸하다.

그저 통치계급의 하수인 역할에 그칠 뿐인 현실에서 마주하는 한계를

과연 그들은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을까.


당장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런 물음에 해답을 찾고 있는 중인데.......


왜 학교에 다녀야 하지?



2011년 6월이다. 막내의 얼굴이 떠오른다.


지금의 학교 교육에서 그 아이가 얻은 것은?

친구들, 사회생활에서 만나지는 관계, 지식?

열여섯이 되도록 학교와 함께 생활하면서 얻은 경험들이 약보다는 독이 더 많았다고 생각하면

너무 지나친 것일까.


아이를 두고 모험이란 단어를 떠올릴 수 없는 나는,

아이들에게 무엇도 강요할 수 없기 때문이고 나의 선택이 아이의 선택과 같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아이가 살아가야 할 미래이기에.

다만 이 여름 아이에게 기회를 건네본다.


학교를 벗어날 수 있는 선택의 기회를!


스스로 가두어 놓고 있는 분노들이 밖으로 터져 나와 깨어졌으면 싶다.

스스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내어 자신의 목소리로 소리칠 수 있으면 싶다.

그렇게 세상을 살아가길 바라는데, 기다리는데 아이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자율의 의미를 너무 일찍 건넨 후유증 같기만 한데, 아이는 자율이 오히려 고통인 듯하다.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이 이 땅에선 그렇게도 힘겨운 것인가 싶다.

아이가 불행하다면 학교를 왜 보내야 하는가?


난 '아이는 스스로 큰다'는 루소의 『에밀 』에서 벗어날 수가 없으니.


2012년 여름. 4년 전이다.

아이는 고등학교 입학을 거부했다.

밤 11시까지 입시를 위해 자신이 그곳에 왜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에.


바다 건너로 길을 떠났다.

낯선 경험의 시간을 그는 유쾌하게 보낼 수 있는 아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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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의 화려한 외출.


그리고 현재.


아이는 성인이 되었고 그 성인은 모두가 걸어가는 것이라 여긴 그 길 위에서 다시 다른 길을 따르고 있다.

적어도 학교의 불행을 피한 것이지만 한국 사회에 그의 자리는 없다.


여전히 불행한 나라.

그는 길 위에서야 비로소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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