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저편으로 가라앉은 자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프리모 레비

by 이창우


히틀러는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당선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독일 국민들이 전 세계에 머리를 조아리고 처절하게 반성하려는 노력들도 그런 의미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었죠. 정당성은 없지만 형식적으로 한국의 대통령은 청와대에 앉아 있습니다. 정부의 수반으로 그 자리에 있다면 적어도 대통령으로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지난 이명박 정권을 기억해 냈다면 절반의 시민이 선택한 한 명에 의해 국가의 원칙이 무너져 내리는 일은 저지되었을까요. 한 사람의 정체성은 자신의 환경에 영향을 받고 형성되어 갑니다. 그 영향이 긍정적인 힘으로 퍼지는 것은 그 개인의 의지에 달린 문제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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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의 생존자인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의 저자 프리모 레비는 이 책의 결론 부분에서 말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감각을 벼리고 있어야 하며 예언자들과 마법사들, 또한 타당한 이유들의 밑받침이 없는 “아름다운 말들”을 말하고 쓰는 사람들을 믿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지요. 그는 이 책을 유작으로 남긴 채 자살을 했습니다.


나치 라거(수용소)의 생존자인 우리가 전하는 경험은 신세대들에게는 상관없는 일이고, 해가 갈수록 점점 더 상관없어진다.
50년대와 60년대의 젊은이들에게 그것은 아버지들의 일이었지만 모든 곳에서 일어날 수 있다.
‘유용한’ 폭력이든 ‘쓸데없는’ 폭력이든, 폭력은 우리 눈 앞에 있다.



현재 한국사회는 헌법의 가치가 훼손되고 법의 정의는 실종되었으며, 상식과 원칙이란 말들은 열어 보지 않는 종이사전 속으로 밀려 들어가 버렸습니다. 한국사회 전반적으로 넓게 확산되고 있는 일들은 한국사회가 과거 개화기에 맞은 열강들에 의한 학습장이었던 시절과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미국의 재정위기를 위해 한국은 희생되고 일본은 저들의 탐욕으로 덩달아 위험한 발상을 시작하더니 아베는 ‘평화헌법 9조’의 새로운 해석으로 전쟁도 할 수 있는 명분을 얻었나 본데 한국의 대통령은 무엇을 얻었던가요. 오바마는 미국 대통령으로 자국의 이익을 위해 외교적 성과를 이루어 냈고요. 정치가 몰락한 나라에 외교의 몰락 또한 당연지사입니다.


실리도 자주도 없는 그동안의 한국 외교는 정부가 내거는 창조경제에는 턱없이 부족한 ‘눈치 외교’ 답습의 구태로 한마디로 능력 부족입니다. 추상적인 ‘창조경제’가 국내에선 미사여구에 불과하고, ‘우물 안 외교’에 머무는 수준인 정부는 외교를 대외용이 아니라 국내 정치용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외교를 대통령 당선 후에 의례적으로 치르는 주변 국가들을 방문하는 모양새에 치중하기에 급급한 것은 실질적인 외교 전략을 할 수 있는 외교 전문가의 부재인 것이겠죠. 대한민국에 외교는 없나 봅니다. 지금 이 정부가 하는 일들은 내일의 한국사회를 말해 줍니다. 프리모 레비는 이 말을 남기며 이 책을 마무리합니다.


아우슈비츠의 자취는 지워지지 않는다. 한 인간의 삶 속에서, 세계의 역사 속에서



1960년 이승만의 독재정권이 학생들 중심의 4.19 혁명으로 무너졌지요. 사람들이 민주화의 봄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을 때,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로 희망을 짓밟아 버렸습니다. 한국전쟁이란 민족상잔을 통해 미국의 묵인과 동조로 재생하여 친일 행위를 일삼고, 국가를 외면해 온 그들이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비극적인 시간들이 가져온 한국사회의 현실은 참담합니다. 하지만 이 두 사건으로 얻은 역사의 교훈은 아무리 지독한 독재정권도 단합된 민중의 힘에 의해서 무너질 수 있으며, 그러나 철저하지 못한 민주혁명은 또다시 총칼을 가진 지배계급에 의해서 파괴된다는 것이겠지요.


이 커다란 역사의 교훈을 기억하지 못한 한국은 현재 군홧발로 짓밟아 민주주의를 압살 시킨 자의 뒤를 잇는 지금의 정부를 탄생시켰습니다. 역사의식이 없는 박정희는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한일회담을 추진, 지금까지 일본 대사관 앞에서 수요집회를 열고 소녀상과 함께 할머니들의 눈물을 지켜보게 하였습니다. 현 정권은 그 눈물을 값으로 따져 정리를 하려 합니다. 과거를 처절하게 반성하지 않는 국가의 야만이 되풀이되는 것은 시간문제 같습니다. 현 정부는 역사를 잊은 나라가 망국으로 가는 길이 무엇인지를 증언하려 하나 봅니다.


80년대 교교 시절 풍경은 지금 학교의 풍경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쉬는 시간이면 영어 단어 하나 더 외우기 바빴고 일류 대학에 들어갈 궁리만 하였지요. 수업시간에 선생님들에게 우리나라가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서 물어보았지만 교사의 권위를 내세워 정부를 옹호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죠. 간혹 양심 있는 교사들은 문제의 핵심을 피해갔습니다. 반 세기가 지난 지금과 다를 것이 별로 없습니다. 이제는 노골적으로 정부의 입장에서 학생들을 편협하게 몰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고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책을 읽는 아이에게 수능 공부나 하라는 곳이 되었지요. 참 교육을 외치는 진정한 교사들은 광장으로 나가야먄 하는 현실에 와 있으니까요.


역사 앞에서 당당할 수 없는 한국사회는 예정된 길을 걸어왔던 것입니다. 해방 후 71년이 되도록 한국사회가 뒤쫓은 것은 미국이라는 망령입니다. 실용주의 교육을 내세우는 미국식 교육에 앞장서고 유용한 것이 진리인양 이끌어 온 교육 과정에 당연한 결과는 아닐까 싶습니다. 모국어보다는 영어 몰입에 빠진 한국사회는 길을 잃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시급하게 할 수 없는 일들을 마냥 기다리며 지쳐가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자기로부터의 혁명은 가능합니다. 기성세대의 적극적인 의지가 역사의식을 갖춘 젊은 세대에게 길을 묻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들에 힘을 모아야 하겠지요. 타인의 변화를 바라기보다는 나의 변화가 더 쉬우니까요.


이해가 안 되는 많은 일들 중에서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뽑은 이들이 어쨌거나 절반을 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인생이 자식의 인생으로 판박이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지요. 아버지가 독재자라는 이유로 그녀가 대통령이 되어선 안 된다는 논리가 아닙니다. 정치의 과정에서 그동안 보여준 대통령의 역사의식에 문제를 제기하게 됩니다. 여러 이유가 있었다 해도 늘 화가 나는 것은 역사의 교훈을 망각한 무지라고 말하고 싶지만 실상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기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올바른 역사관이 형성되지 않았던 한국사회에서 민족을 팔아 제 배를 불린 자들이 기득권자가 되어 지금까지 강자로 군림하고 있도록 망각한 것이지요.


2014년 여름, 중국의 시진핑이 다녀갔습니다. 서울대에서 그가 한 연설을 보면 그 또한 자국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외교에 힘을 모은 듯합니다. 그의 방문에 베이징의 분위기는 정부 측의 해석과는 차이가 있지요. 동북아 역사를 강조하여 한국과 공조로 자국에 이익을 도모하려는 정삼회담인 것입니다. 중국 역시 '동북공정'으로 자국의 이익만을 두고 펼치는 외교이니까요. 도대체 한국사회의 이익은 누가 도모하고 있는 것일까 생각하다 현재로선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현실의 불안과 불확실한 미래에서 오는 두려움만 커지나 봅니다. 그러나 오지 않은 미래에 공포를 만드는 것보다 현재를 알고 투쟁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 아닐지요. 역사의 저편으로 가라앉은 자들을 구조해야 합니다.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던 이들을 기억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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