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양 』다자이 오사무
1947년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어 천재 작가라 불리던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이다. 전후 일본의 몰락해가는 귀족들을 다룬 내용이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독자들의 호응을 이끌어냈고, 당시 몰락한 명문 귀족이라는 뜻의 ‘사양족’이라는 말을 탄생시켰다. 현대에서 늘 충돌하는 지점이 과거의 시대에 맞지 않는 새로운 감각이긴 하다. 과거의 시선으로 현재를 판단하려고만 할 때의 불협화음이랄까.
"태어나서 죄송합니다."라고 중얼거리는 것이 다자이 문학의 얼굴이라고 하던가. 데카당의 분위기, 속죄의 니힐, 휴머니티와 페시미즘 등으로 그의 작품을 말하기도 한다. 작중 인물, 사양족의 세 사람과 또 한 사람이 보여주는 삶의 색깔은 우울한 잿빛이다. 인생의 허무와 자학의 말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등장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전후 시대가 아니더라도 지금을 살아가며 개인들에게 전락은 얼마든지 가능한 정서일 수 있으니.
몰락하여 살던 집을 정리하고 시골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내려는 가즈코, 어떤 상황에서도 기품을 잃지 않는 이 시대의 ‘마지막 귀부인’인 어머니, 그리고 전쟁터에서 돌아와 마약 중독과 방황으로 삶을 포기해가는 남동생 나오지는 사회적 약자에 놓인 수많은 얼굴과 겹쳐질 수 있다. 어쩌면 내가 사회적으로 약자임에도 강자인 척할 수밖에 없는 가면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게 만드니까.
카즈코는 퇴폐적인 작가인 우에하라를 흠모하고 "불량자란 다정하다는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하며 그에게 사랑의 편지를 쓴다. 세 번의 편지에도 답장은 없었고 어머니의 죽음 이후 그녀는 불량자를 직접 만나 그의 품에 안길 수 있게 된다. 바로 그날 아침 동생 나오지는 자살을 한다. 구 시대의 문화와 도덕과 인습에서 벗어나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이 나의 도덕 혁명의 완성이다."라 생각하며 아이를 낳으려 한다.
죽고 싶을 때 죽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정말 큰 행운이라 하면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에게는 허세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내게 있는 대상을 향한 사랑의 힘이 고갈되면 내가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을까. 그것도 대단한 용기가 없다면 힘든 일이다. 그렇게 산 자에게 죽음은 유희로 보일 수도 있겠지. 죽음 앞에서 만큼은 나와 다른 그 어느 대상과 비교하는 짓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
나도 개인적으로 죽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 선택의 잘잘못을 따질 필요는 없다. 그땐 그 결정을 한 내가 따랐을 뿐이니까. 문제는 그 선택이 거부당했을 때 같다. 그런 상황을 운명이네 불가항력이네 등등 말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느낀 그 이후의 삶에 변화가 중요한 거였다. 나는 아직도 그 죽음의 방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다. 그렇게 낙인처럼 내 안의 죽음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겠지.
참으로 성가신 것이 딱 하나 있다. 그것은 나도 근원을 알아차릴 수 없는 것으로 지극히 본능적인 거다. 그것이 발동하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뒤돌아서게 된다는 거다. '단절'의 의미는 내 마음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것은 현실적으로 늘 나를 대상에게서, 그 세계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곤 했다. 다자이 오사무 작품 속의 요조가 묻는다.
신에게 묻겠습니다. 무저항은 죄입니까?
나는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인간의 진솔한 모습이 좋다. 작위적으로 만들어낸 인물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내면에 흐르는 감정들을 일상처럼 풀어놓는 것 같아 친근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아마도 내 삶에 깔려있는 회의주의자이면서도 미래 가능성을 믿고 희망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닐지 모르겠다. 문학에서 만나는 인물들의 말 건넴은 절망을 통해 가능성의 열매를 던져주는 속삭임이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