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경영학 』/ 최동석
위경련이 일었다. 내 몸의 주인인 내가, 내 몸을 잘 지키지 못한 결과이다. 나의 삶을 경영하는 과정을 돌아보니 위경련은 너무 늦게 일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진작에 겪어야 할 일들로 여러 번의 조짐을 보여주었지만, 그것을 지나쳐버린 것의 대가를 지금부터 치루어야 한다. 개인의 삶과 마찬가지로 내가 살아가는 세계도 잘못된 경영으로 현재의 양극화 사회를 만들어 냈다. 그 대가는 기업의 노동력 착취다.
대학에서 경영학과가 가장 진입하기 힘든 곳이라는 점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아가는 이로서 굳이 물음을 던질 필요조차 없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에 대한 답이 이 책에서 발견된다. 저자 최동석은 경영이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는가에 집중한다. 인간의 실존에서 경영의 민주화까지 반드시 전제될 것은 철학이다. 저자가 말하는 인간존중의 경영은 의외로 단순하다.
마음이 개인의 변화뿐만 아니라 조직의 변화와 혁신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한다. 고통받고 있는 구성원의 마음을 치유하지 못한다면 경영은 지속 가능하지 못할 것으로 철학의 부재를 짚고 있다. 모든 것의 결과가 숫자로 정리되어야 하는 경영학에서 인간이 자원이 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나는 사회에서 어떤 숫자로 기록될 수 있을까. 기업의 효율성과는 상반된 마이너스 숫자로 기록될 거다.
저자 최동석은 한국사회의 경제에 주로 영향을 미친 미국의 경영학이 무엇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는지를 말해준다. 그 출발점의 테일러리즘은 인간을 기계의 부속품으로 생각해서 과학적으로 기업 조직을 했다는 점을 말한다. 기업 조직에서 벌어지는 모든 생산 활동을 계량화하여 숫자로 경영한다는 것이다. 계량화는 사물의 고유한 가치를 삭제했다. 고유한 개인의 역량을 단 하나, 숫자로 획일화한다는 등급과 같다.
수학적 사고야말로 이성적 활동의 가장 아름다운 영역을 차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사의 모든 문제를 계량화 또는 수학화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오만이 현재의 경영학으로 이어졌다. 1980년대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 시절부터 지속한 신자유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서 한국사회는 빠져나와야만 한다. 돈을 위해 삶을 버리는 일을 멈춰야 사람이 제대로 산다.
철학적 사유를 경영철학으로 삼아야 한다는 저자의「다시 쓰는 경영학」은 조직에 대한 그동안의 잘못된 이해와 새로운 목표를 향한 성찰을 요구한다. 경영학에서 성찰은 어떤 의미인가. 조직구조설계에서 피라미드식 위계 구조와 위계질서가 조직의 생산성을 향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숫자가 사태의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발견한 것은 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비상식적인 현상들에 반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경영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저 한 권의 책으로 남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만큼 조직운영의 주체가 되어 인간이 스스로 자율적인 존재로 대접받기를 원할 수 있는가는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근대성을 벗어나지 못한 채로는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정치가 그 일을 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합리적인 시작이다.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라 부르는 드러커는 CEO들의 높은 연봉에 대해 도덕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용서할 수 없는 짓이라고 비난했다. 20세기 후반부의 경영학은 제2세대 경영학으로서 조직을 하나의 유기체로 간주했다. 이런 사상을 저자는 드라커리즘이라 말한다. 핵심은 조직이 하나의 생명체처럼 외부 환경의 정보와 에너지를 받아들여 조직의 성장과 발전을 위한 신진대사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실존적 사유를 말한다. 실존의 영역을 계량화의 칼날로 해결하려는 경영자들이 이 유혹을 이겨내는 방법으로 제시한 것은 참으로 간단하다. 역사와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다. 경영학은 CEO들만의 영역이라는 고정된 시각부터 바꿀 필요가 있음을 알게 해준다. 한 개인의 삶을 경영하는 것부터 철학적 사유는 우선되어야 했다. 기업 경영 철학이 없는 사회에 인간은 존엄을 버릴 수밖에 없다.
인간이란 영혼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려는 실존적 존재다.
사상가가 아닌 경영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가 철학적 사유를 조직에 불어넣어야 기업 조직의 노동생산성을 지금보다 두 배 이상 높아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노동생산성은 노동자 스스로가 만족하는 삶의 향유 위에서 가능하다. 어디 경영학만의 문제일까. 세분된 현대사회 학문의 영역은 부분에 매몰되어 전체를 잊게끔 하지 않던가. 생존을 위한 노동이 아니라 삶을 향유하기 위한 노동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겠나.
「인간의 이름으로 다시 쓰는 경영학」에 더욱 주목하게 되는 것은 국가의 경영으로 ‘9월의 성과급제 반대의 노조 파업’에 정부의 반응을 보면서이다. 그야말로 영혼이 없는 경영자의 모습이다. 분리된 영혼과 살아가야 하는 한국사회에서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책이나 읽고 쌓이는 분노에 치를 떨어야만 한다. 노조파업에 시민들이 동조하여 그들에게 힘을 실어야하는 이유는 곳곳에 넘친다.
정치권력의 정점에 있는 이의 모습을 통해 예측하는 한국사회의 미래는 암담하다. 신진대사가 멈춘 사회, 경영의 중심이 자본이 된 현실, 사람은 없다. 합리적 이성을 효율성의 근거로 삼아온 대한민국 경제는 노동 착취의 다른 이름이다. 고통의 시작은 어디인가? 한국사회에 노동자의 삶이 현실적으로 보장되지 않는다면 사회 공공성은 가능하지 않다. 노동은 인간의 유희가 되어야 마땅하다. 생존을 위한 노동은 8시간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