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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창우 Sep 29. 2016

기업의 유령 놀이

[영화] 일 포스티노 / 마이클 래드포드 감독

 노동자를 배신하는 기업의 구조조정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오랫동안 우리는 세계경제에서의 경쟁이 얼마나 힘든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왔다. 그리고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임금이 제자리를 맴돌고 있을 때, 임원들은 더 많은 임금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직장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도덕적 문제는 '공평성'이다. 우리는 임금의 불평등을 당연하게 참는다. 왜 그럴까?     


 지나온 시간 동안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기업들은 고용인들과 이윤을 공유하기는커녕, 시장과 주식시장에서 거둔 성공을 치하한다며 임원들에게만 막대한 상여금과 스톡옵션을 주고 있다. 경쟁에 대한 일상적인 두려움으로 인해 일부 노동자들은 회사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급여와 혜택을 희생하기도 한다. 그 대가로 그들은 종종 회사가 정상화되었을 때 이윤을 공유하겠다는 약속을 받기도 한다.     


 그 약속은 유효한 듯해도 실상은 지켜지지 않는 약속이라는 것도 알고는 있다. 어쩌겠는가. 살찌고 비열한 기업들은 본질적으로 가격뿐 아니라 임금까지도 통제하는 강력한 정치 권력가와 힘을 합해 그 모든 사실들을 조작한다. 그때 등장하는 말은 '세계 노동시장에서의 경쟁' 또는 '국가경쟁력 강화'이다.     


 기업윤리가 실종된 '승자독식'의 사회를 멈출 수 있는 것은 무엇이어야 할까. 임금의 불평등을 이토록 오랜 시간 참아낼 수 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만 하는 것일까. 조안 B. 시울라는 그의 저서 '일의 발견'에서 기업들이 발견한 '기계 안의 유령'을 거론했다.     


그 유령은 바로 '세계경제'라는 것이다. 이 유령을 통해 고용주는 경쟁을 내세워 얼마든지 노동자가 희생이 된다는 것에 책임을 질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국가가 없으면 개인도 없다는 말과 기업이 없으면 노동자도 없다는 말로 노동윤리는 우선되고, 기업윤리는 실종되곤 한다.            

          


 이 영화는 1952년 고국 칠레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추방당한 세계적 명성을 가진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이야기로 이탈리아의 작고 아름다운 섬에 망명하여 생활한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이다. 순박한 노동자 '일 포스티노(이탈리아어로 집배원)' 마리오가 망명 생활을 하는 시인에게 우편물을 배달해 주면서 순수한 자아를 발견해 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    


 네루다의 전용 우편배달부인 마리오는 시의 은유와 공감을 시인과 공유하면서 행복과 우정을 쌓는다. 네루다가 추방령 해제로 본국에 돌아가자 세상의 아름다움이 함께 떠나간 줄 알았던 마리오는 시적 영감을 통해 듣게 된 마을의 소리들을 녹음기에 담는다.     


파도, 바람, 서글픈 그물, 그리고 시인의 도움으로 결혼하게 된 아내, 베아트리체의 뱃속에 있는 아기의 심장 소리 등 자신이 살아온 자기 세계의 소리다. 그는 이탈리아 공산당 집회 때 민중 시인으로 초청받아 '파블로 네루다에게 바치는 시'를 낭송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연단에 가는 도중 경찰의 폭력에 피를 흘리고 결국 떠밀린 군중에 깔려 목숨을 잃는다.      



 영화에서 이 장면은 현실에서도 국가에 의해, 기업에 의해 폭력의 대상으로 무참히 짓밟히는 사회적 약자들의 삶, 일상이 되어버린 '소외'의 모습들을 발견하게 해 주었다. 선거를 앞두고 마을에 공사를 벌이는 후보자는 선거에 당선되자 그 공사를 일방적으로 철수한다.     

           

"누가 죽기라도 했습니까?"     
"우리에겐 이보다 큰 불행은 없습니다. 2년간 인부들이 온다기에 잔뜩 기대를 했거든요. 계획도 세우고 융자도 받았어요."     
"저도 일을 끝내고 가지 못해 유감입니다. 곧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겁니다."     
"곧이요? 언제쯤이요?"     
"나도 모르죠. 그건 두고 봐야 알지요. 하지만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뭘 두고 본다는 말이죠?"     
"회사일이란 복잡합니다."     
"회사일 같은 건 잘 모릅니다. 하지만 난 멍청이가 아니오. 우린 당신이 선출되면 공사가 끝날 줄 알았어요."  


 이 영화는 지식인의 현실 참여를 주요 소재로 거론하지만 그와 더불어 자각하는 민중의 모습을 서글프게 보여 주기도 한다. 언제나 가진 자들에게 이용당하는 약자들의 모습과 진실을 찾아 투쟁하려는 군중들을 통해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이 보여줄 수 있는 가능성, 그로 인해 사회의 변화도 가능하다는 약간의 희망을 보여주었다.     

 

 지식인들이 사회 문제를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며 실천적 영역에서 수행할 역할들, 가진 자들의 사회에 환원할 도덕적 의무를 생각하게 해준다. 선거용으로 보여준 마을을 위한 공사로 표를 모으고, 당선되면 모른 척 해 버리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그들에게 우린 늘 속고 또 속는다.         

                

 1926년 발족한 주식회사 유한양행의 설립자 유일한 박사는 정직과 성실을 경영이념으로 사회공익을 기업에 앞세우고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국가 산업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민족기업가였다. 행동하는 독립운동가, 그리고 민족의 미래를 제시한 교육가이기도 하다. 유일한 박사의 가르침은 고스란히 그의 자녀들에게 이어졌다.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 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

기업의 소유주는 사회이고, 단지 그 관리를 개인이 할 뿐이다.

건강한 국민만이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

 

 인간 존중을 사업의 기본철학으로 가지고 자신의 신념을 기업윤리로 사회적 책임을 다한 유일한 박사가 남긴 말이다. 이 땅의 아이들은 사회적 책임을 다 하고, 이 나라에 기업의 윤리를 철저하게 보여주고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기업가 유일한을 잘 모른다.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다른 책들보다 강제적으로라도 읽히려고 하는  위인·인물전 시리즈에 있지만 요즘은 그나마도 기대하기 힘들다.


 전집의 번호에 맞춰 먼지 쌓인 서가에 있을 뿐이다. 그래도 우리 사회가 그렇게 꼼짝 못 하고 생활 속에서 만나는 ‘삼성’의 설립자 이병철의 이름은 결코 이 위인·인물전 시리에 감히 등장하지 못한다. 무노조의 삼성은 노동자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저 경영이익을 대변하는 변수의 수단일 뿐이다. 대학 진학 시 인문계열로 진로를 잡고 학과를 선택할 때 가장 많은 학생이 지원하는 곳도 경영학과이다. 한국 사회가 경제지상주의에 매몰되어 온 지 정부 수립부터 66년이다. 초등학교부터 시작된 학습의 연장에서 넘치는 경영학도들의 활약이 진행되고 있는 현재, 노동자는 없다. 



 경영 철학이나 기업가 정신에 대해서는 얼마나 무심했던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돈만 잘 버는 경영자의 모습이 기업의 윤리를 외면하고 이 사회에 얼마나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 왔던가는 결코 논하지 않는다. 사회가 요구하는 성공신화는 '돈'이다. 그렇기에 나쁜 정책에 맞서 노조 파업을 하면 노동자는 졸지에 나쁜 노조원이 되는 거다. 국영기업일 경우 나쁜 정부는 공공성을 해치면서 노조 파업을 불법으로 몰아가며 탄압하는 거다.     


 헌법에 보장된 노동자의 권리인 노동조합의 파업이다. 몇 해 전 '뉴스타파'가 ICIJ와 ‘조세피난처 프로젝트’를 공동 취재한 결과로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한국인들의 명단 발표도 생각해 본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 사회에 실종된 기업의 윤리의식과 사회적 책임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기는 하다. 그러나 기업윤리가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었을 때 자본주의는 노동자와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 두어야만 한다.

               

 ‘삼성 비자금’ 특검 수사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던 이건희는 2009년 12월 이른바 ‘원 포인트’ 특별사면을 받은 뒤 이듬해 2월 IOC 위원으로 복귀했고, 3월엔 삼성전자 회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가 돌아와 유치할 수 있었다고 하는 평창 올림픽은 대대적인 자연 훼손과 지방 제정을 위기로 몰아가며 올림픽을 위한 시설물을 건설 중이다.  

   

 삼성의 김용철 변호사가 양심 고백을 하면서 우여곡절 끝에 펴낸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펴냄>에서 사제를 찾아가 행한 고해성사 이야기가 옛날이야기처럼 되어 버린 우리의 현실도 생각해 본다. 김용철 변호사를 보호하던 정의구현 사제단은 기자회견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삼성공화국을 만든 것은 언론과 지식인, 모든 국민이 공범이다.  

 8년 전의 이 말은 흔적도 없지만 난 그 공범들이 다시 힘을 합하면 괴물을 물리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빠져 있다. 건강한 사회는 어느 한 사람의 의지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랜 시간 검은돈이 만든 정경유착으로 나타나는 일들을 그저 멀거니 바라본 대한민국은 이제 달라져야만 할 때이다. 모든 세대들을 넘나들어 자기 각성이 필요하며 사회 문제가 나의 문제라는 의식의 전환은 필수이다. 사회적 성찰 없이는 불가능하며 적극적인 실천을 함께 해야만 한다.     


 나는 그 시작이 의식 있는 지식인들과 사회적 약자들의 힘이 되어 줄 공동체, 자본에 굴복하지 않는 다양한 분야에서 '작은 공동체의 탄생'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혜택을 받는 기득권층은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보다 공평하고 공정한 질서의 재편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한 사회의 상층부들이 솔선수범하지 않는다면 정부는 집단의 보수주의적 지배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전락되고, 여전히 노동자들을 착취의 대상으로 여기며 사회의 암적 존재로 남을 것이다.   

  

 나의 이 글쓰기는 순전히 개인적인 만족감에서 시작되었지만 내가 지닌 특유의 낙관주의는 분명 나비효과를 불러올 것이라 믿고 있다. ‘선한 싸움’이란 이름으로 행하는 저항이며, 미래를 향한 희망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 즉, 실패에 대한 두려움일 뿐이다. 내 아이들이 노동자는 싫다고, 돈 벌어서 부자 될 거라고 하는 말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노동에 기쁨을 느끼며 향유하는 삶을 누릴 수 있게 하고 싶음이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가능할 낙관이다.     

 


 존재의 고귀함을 추구하지 않는 사회, 자신의 문화적 소양을 높이기 위해 긴장하지 않는 사회, 자기 성숙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사회는 그들이 이행하여야 할 '사회적 책임'을 외면하는 것이다. 기득권자들의 집단 이기주의로 대다수의 소외 계층들은 삶에 허덕이게 된다.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기업은 현대사회에서 공공의 적이 될 수밖에 없다.    

 

 기업은 자본주의의 꽃이며 사회와 더불어 발전하는 조직이다. 기업이 사회를 떠나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기업 윤리가 실종된 사회에서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자존감을 잃게 만든다. 여기, 사람들이 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노동자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사회적 타살에 아무도 자유로울 수는 없다.    

 

 노동자를 향한 강자들의 폭압, 노동조합을 상대로 하는 그동안의 손해배상 판결들이 그렇다. 자본으로 노동자들을 질식하게 만들어 군림하려는 어둠의 힘이 사회를 비통하게 하고 있다. 그들은 사회의 구조를 이용해 인간을 도구화시켜 이윤의 극대화에 급급한 자본의 도구가 되도록 노동자들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다.    

 

 또한 '국가경쟁력 성장'이라는 말로 정치적 권력과 기업의 이윤 추구만을 위한 효율적 생산을 위한, 하나의 사회적 장치로써 작동되는 법 앞에서 평등은 사라졌다. 당장 돈이 없는 노동자들에게 재판의 과정에 소요되는 비용들은 이 사회의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 준다.    

 

 노조에게 기업들이 휘두르는 손해보상 청구 소송은 분명 노동탄압이다. 거대한 관료 조직과 결탁한 우리나라의 법원은 그 형평성을 잃었다. 도대체 법관이라는 직업윤리는 찾아볼 수가 없다. 자신의 직업에서 발휘될 고유함이 이 사회에 어떤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지는 물론 개인의 선택이다. 그들은 정의의 저울 앞에서 부끄러워해야만 한다.     


 우리 사회에서 노동은 제 기능을 잃어버린 지 오래이다. 노동자를 기계 부품쯤으로 여기며 기업가들은 노동자를 착취해 왔다. 저임금, 고강도의 노동, 인권 유린, 등을 제도 안에서 마구 휘둘러 왔다. 그런 기업의 횡포를 정부도 공범이 되어 외면해 오고 있었다.     


 노동은 단순히 돈벌이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 가치를 일깨워 주는 것이다. 노동에 대한 가치를 잃어버리고 살아간다면 이 시대는 희망이 없다. 노동은 신성하다. 우리는 그 신성함이 사람을 더욱 사람답게 한다는 진리를 지켜나가야만 한다. 갈 길이 까마득해 보이지만 그래도 함께 걸어가기를 멈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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