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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창우 Oct 06. 2016

기본소득 - 공동체의 정의

나는 국가로부터 배당받을 권리가 있다 / 하승수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이 무너질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 가족에서부터 주변인, 내가 소속된 곳에서는 원인을 찾아 바로 잡을 수 있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세상일에서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믿었던 것들이 잘못되었던 것을 알게 되면 여러 방법을 찾아 결국에는 내게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믿어버리며 살아온 것 같다. 내가 믿고 싶은 것으로 믿는다는 의미는 진실을 외면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결과로 국가로부터 받는 모멸감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에 서 있다.


 이 팸플릿에서 저자 하승수는 세상일에서 세 가지 의문을 말한다.


첫째는, “과거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다는데, 왜 이렇게 불안하고 살기가 힘든가?”이다.


둘째, “왜 이렇게 불평등한가?”


셋째, “이런 식의 삶과 사회가 미래에도 지속할 수 있을까?”를 통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합의를 제시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왜 우리는 이런 일들을 알아차릴 수 없었던가?” 였다. 대한민국이라는 민주 공화국에 살면서 민주주의, 공화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살아왔다면 ‘기본소득’은 너무도 당연하다. 


나는 국가로부터 배당받을 권리가 있다! 


 기본소득을 시민 배당이라고 할 수 있다는 하승수의 말을 빌리면 용어는 낯설지만 “내가 돈을 받을 권리”라는 것을 표현하기에는 ‘배당’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본래 공유였던 것을 사유화해버렸는데, 그것에서 나오는 이익이라도 공유화해서 시민들에게 배당을 주자는 것이다.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 이미 세상에서 현실화되고 있는 생각이라는 것에 주목한다면 이 절망스러운 사회에서 충분히 절망했기에, 기본소득이라는 희망을 품어야 한다고 했다. 불가능과 가능성의 경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면 그 희망은 현실이 될 수도 있다.

 

 기본소득 또는 시민 배당이라는 생각의 뿌리는 뜻밖에 깊다.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은 소수에서부터 시작되어 부분적으로 공론화되어 실현된 곳도 있다. 주민에게 ‘돈벼락’을 내린 알래스카 주는 북극해에 면한 유전에서 석유가 나오면서 주 정부 수입이 많이 생겼는데, 이걸 잘못 써서 낭비하느니 차라리 주민들에게 나눠주자는 발상을 했다는 것이다. 5년짜리 정부가 하는 일은 참으로 치졸하다. 정부를 이루는 관료들의 이기주의는 상식도 법도 정의도 말아먹어 버렸다. 인간이 중심이 아니라 제도 중심의 사회에서 자유에 가린 공동선은 최소한으로 머문다.  


 1980년 봄은 분명했다. 독재의 종식이라는 10. 26이 전두환에 의해 연장되는 시간이었다. 지금 이 계절도 짙은 안개가 드리워져 코를 처박고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분명한 것이 없다. 한국사회에서 공동체적 정의는 정부에 의해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다. 자유주의에 기반을 둔 시장경제, 개인주의에 대한 지나친 몰입은 도덕적 해이를 외면하게 해왔다. 자신을 공동체에서 배제하면서 감정보다는 이성으로 무장하는 것이 잘사는 방법론처럼 여겨져 왔다. 성취보다는 성공을 꿈꾸며 달려가는 개인에게 공동체는 이해관계의 장으로 존재할 뿐이다.  


 기본소득 또는 시민 배당은 공동체주의가 주장하는 ‘공동체적 정의’이다. 한편으로는 공동체를 위한 것이라는 명분으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거나 훼손한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인류의 진보는 공동체였기에 가능했다. 현재의 내가 존속할 수 있었던 데에는 지난 세대들의 공동체를 위한 공공선에 기초하여 왔다. 내가 일상에서 행하는 아주 작은 정의가 모여 정의로운 사회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국가 차원에서 진지한 논의가 되어 브라질 경우에는 기본소득을 지급하자는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했다고 한다.  


 한국 기본소득네트워크는 2009년부터 ‘기본소득 제도의 사회 대안적 가능성’으로 사회 대안 포럼부터 시작되어 현재까지 사회 공론화를 위한 행동을 진행하고 있다. 아직 정당에서 의제로 삼은 곳은 없지만, 기본소득에 관해 관심을 두고 있는 움직임은 가시화될 것이라 본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사회는 아직도 조급증에 시달리고 있다. 정치가 작동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대의제는 직접적인 시민 참여로 확산해야 한다. SNS로 보이는 세상에서는 마치 당장에라도 달라질 변화를 생각하게 해주지만 행위 없이 긍정적 변화는 가능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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