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뭐길래] 다시는 그런 일 없도록 투명하게
내가 정치를 공부하는 일은 이 사회에서 행복한 시간으로 내 삶을 채우기 위한 거다. 그래서 가장 궁금한 것을 먼저 알아가며 이해하려 노력하는 거다. 그동안 사회적으로 학습된 내 머릿속에 있는 기존의 생각들을 좀 벗어나서 차근차근 진행해 보는 일은 꽤 재미있다. 그래서 개념부터 정리해 보고 키워드를 설정하고 그와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내며 끊임없이 묻고 또 묻는 일이기도 했다.
정치(政治)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두 가지의 의미를 알 수 있다. 하나는 통치자나 정치가가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거나 통제하고 국가의 정책과 목적을 실현하는 일이다. 두 번째는 개인이나 집단이 이익과 권력을 얻거나 늘이기 위하여 사회적으로 교섭하고 전략적으로 활동하는 일로 풀어놓았다. 정치는 이사회에서 살아가는 구성원들이 할 수 있는 일인 거다.
사회 분야마다 전문가들이 있다. 그들의 책이나 관련된 자료들을 찾다 보면 떠오르는 물음들이 있다. 주변에서는 유독 정치와 관련된 책들도 말들도 조심스럽게 꺼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최근에는 사상에 대해서까지 조심스러운 말에 끼어들어 가버린 것 같은데 이런 일들이 꽤 오랫동안 한국사회에 내재하여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검열이 자연스러워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일상에서 특히 ‘정치’는 이상하리만치 멀리 있다.
음모론이 극성을 부린다는 의미는 그만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부쩍 눈에 띈다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나의 시선을 끈 관심사는 ‘선거 개표’이다. 이와 관련된 기사나 방송은 '역 누적 미스터리'를 파헤치고 있는 한겨레의 팟캐스트 ‘김어준의 파파이스’이다. 2012년 12월 19일 대선이었다. 그때 개인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선거 결과였다. 이 대선의 결과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은 그때까지만 해도 순전히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개인의 몰이해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어떻게 18년 간을 시대에 맞춰 변신하던 기회주의자에서 쿠데타로 독재자가 된 그의 곁에서 영부인 역할까지 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택할 수 있을까? 대선 후보 과정부터 역사인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통쾌하게 자신의 입장이나 생각을 토로하지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 후보의 주변에도 역시 국가보다는 개인의 이해관계가 우선인 사람들이거나 권력을 위한 변신의 귀재들로 일색이었다. 시민의식이 만들 기회가 없었던 사회 환경 탓일까도 싶고 그만큼 알 권리를 누릴 수 없는 정보의 불평등 때문일 수도 있다.
결국, 87 항쟁 이후 한국적 민주주의는 그 명을 다했다고 보았기 때문에 적어도 이명박 정권을 지나오면서 선거를 통해 그 정권이 연장되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5년을 겪고도 이런 대선 결과가 나올 수 있었다는 점에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물론 언론의 불공정함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진행된 것이기에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은 것도 한몫했다. 옳지 못한 방법으로 얻은 부귀는 뜬 구름 같다는 공자의 말에 위안을 삼을까.
그렇게 박근혜 정부에 와 있다. 여전히 언론은 그 모양으로 있고 제1야당의 분열은 그칠 줄 모른다. 삼권 분립이라는 민주주의의 원칙은 어느새 삼권 통합으로 되어 가고 대한민국의 헌법 정신은 고사 직전에 놓여 있다. 시민의 집회와 시위를 IS와 동격으로 규정하려는 정부에 평화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 적어도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될 수 없어야 한다. 정치가 작동되지 않는 사회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렇게 음모론이라 불리기도 하는 선거 결과의 부정이 사실이 되기까지 그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런 시간이 지나 2016년 11월의 대한민국은 국정농단 사태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자격 없는 1인이 사적으로 이용한 국정운영은 혼란에 빠졌다. 매일 쏟아져 나오는 대통령과 관련된 기사들이 왜, 이제야 드러나는지 생각해본다. 하루아침에 찾아낸 뉴스처럼 마치 최근에야 찾아낸 사실처럼 떠들어대는 언론사들도 현 정권의 부역자는 아니었는지 따져볼 일이다. 이제야 정치가 뭔지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에서 유일하게 평등한 1인 1표로 다수의 유권자가 행사한 투표가 개표 과정에서 부정된다면 결과는 늘 같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겠다. 51:49라는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선거 개표 과정이 투명하게 진행되어 확인할 수 있다면 차라리 속이라도 편할 거다. 어쨌든 유권자의 다수가 선출한 대통령이니 다수결의 오류라 해도 인정할 것은 인정할 수밖에 더 있나. 문제는 투명성이 없어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고 그것은 결과에 승복하기 어려운 일이 된다는 점이기도 하다. 언론의 편파 보도는 그 투명성을 가리는데 일조했다.
개인의 일이야 나 홀로 해결해 나가야 할 문제 일 수 있지만 한 사회에서 일어나는 널린 의문들은 사회 안에서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거다. 그런데 그 의문들을 무시하거나 왜곡해 버린다면 쌓인 물음표들은 결국, 이 사회를 둘러쌀 거대한 장벽이 되고 만다는 거다. 정치는 정치인만이 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 정치가 나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면 바로 내가 정치적이어야 한다는 가장 큰 이유가 될 수 있다. 정치적으로 산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더불어서 공생하는 것을 말하지 않던가.
정부가 현 사회의 제 문제들을 다루는 능력의 한계가 클수록 정치는 현실을 외면하는 개인들을 확산하는 시작이 된다. 내가 아무리 기를 써도 현재의 삶에서 나아지기 어렵다는 생각이 짙어질 때가 있다. 하루의 노동이 내일의 하루를 따라갈 수 없다면 그다음 날을 생각해 볼 수 있을까. 내일 일자리가 사라진다면 과연 노동은 내가 원하는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일까. 사람이 먹고사는 데 필요한 존재로 머물 뿐이라면 인류는 이렇게 긴 여정을 이어오지는 않았을 거다.
내가 선택한 삶의 첫울음은 아니었어도 내게 주어진 삶은 적어도 내가 운영할 수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내 삶을 누리는데 이 사회가 방해꾼이 된다면 그것을 물리쳐야 하는 것 아닐까. 생존은 그런 것이어야 한다. 먹고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야 하므로 먹어야 하는 것처럼 인간으로 좋은 삶을 누릴 이유는 충분하다. 정치적 존재가 된다는 것은 내 삶을 내가 제대로 살아내기 위한 정치인 거다. 끊임없이 나를 낯설게 만나기 위함이다. 너무도 익숙해진 시간에 정치로 딴죽을 거는 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