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 / 김일란, 홍지유 감독
2009년 1월 19일 용산 4 지구 철거민 세입자 20여 명이 강제철거 중단과 철거민 주거생존권을 요구했습니다. 남일당 건물 4층에서 농성에 돌입하자 경찰 1,600여 명 이 배치되고 강제진압을 시도한 거죠. 다음날 경찰의 강제진압 과정에서, 철거민 5명, 경찰 특공대원이 사망한 용산 참사가 발생한 겁니다. 이미 끝난 이야기라고요? 사실은 결코 끝날 수 없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불편할 뿐인 겁니다.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국가의 폭력이 넘치고 있으니까 말이지요.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두 감독은 2009년 1월 20일 새벽, 망루에서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던 사람들, 철거민과 경찰이 서로 다른 위치에서, 다른 처지에 서 있었던 순간을 보여줍니다. 그곳에 없었던 우리가 지켜보길 원했던 것 같습니다. 용산 참사가 있던 그 날로 돌아가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관객들에게 다시 묻고 답을 찾아가길 바랐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재판이 시작되면서 용산 참사가 발생하게 된 배경과 그 사건이 은폐되는 과정이기도 했기 때문이죠. 용산 참사와 세월호 참사, 장소만 달랐습니다. 땅과 바다에 끔찍한 참사가 일어났고 그 진실은 여전히 수면 위로 올라오기를 꺼리고 있다는 거지요.
무디어진 우리 안의 폭력은 멈출 수 없는 것일까요. 국가 폭력은 이름을 달리하여 드러나고 있거든요. 폭력은 꼭 물리적인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합법을 가장하여 공동체의 와해를 부추기며 개인들의 삶을 파괴하는 것이 대표적인 것이죠. 파업 노동자 사태들에서 나타나는 기업의 용역을 동원한 폭력, 그것을 방관하거나 동조하는 국가의 폭력은 한국 사회에 널리 퍼져 있잖아요.
사법부의 정의 또한 바라볼 수 없는 한국사회는 ‘무전유죄 유전무죄’ 임을 판례로써 증명하고 있거든요. 사회 약자들이 보호될 수 있는 최후의 장치마저 사라진 약육강식, 야만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해야겠네요. 좀 무서워지기도 하면서 깊은 구덩이를 마주한 채 넋을 놓기도 했던 순간이 스치기도 합니다. 그래도 야만인으로 남은 삶을 마감하고 싶지는 않아 무엇이든 끄적거리나 봅니다.
사회의 폭력성은 여기에 멈추지 않습니다.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될 일이 대물림 되면서 학교 폭력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현재는 학교 폭력이 발생하면 담임선생님의 판단에 따라 학교와 폭력대책위원회에 알려야 하죠. 화해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판단될 때 담임선생님이 종결할 수도 있거든요. 결국, 교육적인 절차와 법리적인 문제는 결과에 의해 움직이게 되는 사후처리 방법이라는 것이죠. 그렇기에 학교 폭력이 공론화되던 당시, 가해 학생에게 중요한 것은 생활기록부 등재는 결코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이미 등재되고 있습니다.
폭력의 원인을 들여다볼 수 없는 상태, 본질적인 문제를 성찰하지 않으면 폭력은 대물림될 뿐입니다. 한 개인에서 시작되어 가정, 학교, 사회로 확대 재생산되어 간다고 볼 수 있지요. 다양한 모습으로 답습되는 폭력은 대체로 이 사회 ‘소수자’에게 또는 ‘약자’에게 그 수위는 높아져 갑니다. 지속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이 폭력과 야만은 대를 이어갈테죠. 인류가 저지른 자연에게 퍼부운 폭력부터 그역사는 길고 두텁습니다.
사후 처리에 매달리면 폭력의 본질은 희미해집니다. 폭력은 아주 은밀하게 일어난다는 것을 잊어버리진 말자고요. 폭력의 근원을 찾아 개선하지 않는다면 폭력 역시 대물림됩니다. 폭력성이란 것이 개인에게는 나도 모르게 아주 작은 외부의 영향에 의해 불쑥 튀어나올 수 있고, 사회에서 일어난 폭력 역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꾸준하게 그 기운을 쌓아온 것이거든요. 어느 날 갑자기 폭력이 일어났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사회가 폭력에 의지하며 살아온 것 같거든요.
용산 참사가 발생한 지 10년을 앞두고 있습니다. 수인번호 716번이 집권하던 시절을 기억합니다. 경찰청 인권침해 사건 진상조사위원회에서 조사 결과를 발표했더군요.
2009년 1월 20일, 경찰특공대원 1명과 철거민 5명이 목숨을 잃은 ‘용산참사’는 “사람이 있다”는 호소에 귀 막은 무리한 진압의 결과라는 게 거듭 확인됐다. 당시 이명박 청와대가 ‘강력 사건으로 참사 보도를 막으라’는 취지의 경찰 홍보지침을 내리고, 경찰청 수사국이 온라인 여론전을 펼친 사실도 확인됐다.
‘경찰청 인권침해 사건 진상조사위원회’(진상조사위)는 5일 이런 내용의 ‘용산참사’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 결과, 당시 경찰청 수사국은 ‘정보국·경비국 등과 협조해 900명의 사이버 요원을 동원해 인터넷에 경찰 옹호 글을 올리고 언론사 인터넷 투표에 적극 참여한다’는 대응 계획을 수립해 김석기 서울지방경찰청장에게 보고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명박 청와대는 언론의 시선을 용산참사에서 돌리라는 경찰 홍보지침을 내리기도 했다. 당시 청와대 국민소통 비서관실 행정관은 경찰청 홍보담당관에게 “본 사건을 통해 촛불시위를 확산시키려는 반정부단체에 대응하기 위해 ‘군포 연쇄살인사건’(강호순 사건)의 수사 내용을 더 적극적으로 홍보”하라는 내용의 전자우편을 보냈다.
2009년 이 사실이 폭로됐을 때 청와대는 ‘행정관 개인 아이디어 전달’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진상조사위는 이날 “이례적으로 강호순의 얼굴과 신상을 공개하는 보도가 잇따른 점을 보면 청와대의 주장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라고 밝혔다.
또 진상조사위는 경찰이 안전대책 없이 경찰력을 무리하게 투입했다고 결론 내리고, 순직한 경찰과 희생된 철거민 유가족에게 사과하라고 권고했다.
-2018. 09.05. 한겨레 정환봉 기자-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기 위해 한국 사회는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요?
없습니다!
세계는 탐욕으로 야만의 시대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기업의 야만스러움은 한국사회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기업만을 키워주는 정책과 정부가 진행한 국가 간 무역 협정들은 노동자들의 생명을 담보로 진행되어 왔습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노동환경과 기업의 무책임, 그것을 방관하는 정부. 이런 세계의 노동 현실에 한국 사회도 무관심합니다. 한국사회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 왔고 현재 진행형이지요.
노동자들의 생명으로, 내 삶의 미래를 위한 현재를 희생으로 '내일을 위해서'라는 의미였지만 실상 내일은 없습니다. 오늘 같은 내일이 진행될 뿐이죠. 노동조합을 만들 수도 없는 대기업이 가능한 한국사회는 민주 공화국으로 포장된 탐욕의 제국일 뿐입니다. 그 사실을 잊도록 하는 수많은 방해물이 많지만 노동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해 버리는 개인들의 무의식도 상기해야 합니다.
사회적으로 학습된 이념, 반공과 노동조합의 몰이해는 노동을 현실에서 멀리하게 하는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일을 한다면 우리는 모두 노동자입니다. 노동의 환경이 다를 뿐인데 직업 분류에 의해 명칭을 달리하는 게 이상하죠. 아버지의 직업을 노동자로 떳떳하게 말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노동은 어떤 모습인가 생각합니다. 내가 하는 일이, 노동이 부끄럽도록 만드는 것은 내가 받는 돈의 많고 적음이더군요.
"이번 달이 지나면 들어올 돈이 없다고 무작정 겁을 집어 먹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바티스트 밀롱의 『조건 없이 기본소득』을 읽고 난 후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었습니다. 그 두려움을 정부가 매 월 지급하는 약간의 기본소득이 있어서 해소할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생각하면서요. 일을 하지 않아도 행복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노동은 삶이니까요.
일이 없으면 자유도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우리 삶에서 진정한 일은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일'입니다. '논다'는 의미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한국사회에서 일은 더욱 중요하죠. 장시간 노동에서 자부심이 생기지 않는다면 노동하는 시간은 지옥과 같은 것으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노동의 가치는 결과로 쥐어지는 돈이 아니라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이라 생각하거든요.
'조건 없이 기본 소득'이 제도로 현실화하는데 노력할 수 있는 시작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공론화되어 제도로 정착하기까지는 노동자의 현재가 문제로 인식되어야 하고, 스스로를 주저앉히는 내일에 대한 두려움도 극복해야만 합니다. 연대의식은 온 국민 기본소득 운동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것으로도 가능합니다. 적극적인 관심으로 그에 따른 변화는 더디지만. 반드시 올 수 있다는 믿음이 내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으로 작동하고 있거든요.
현재 같아선 꿈만 꿀 일 같지만 많은 사람들이 미래를 위한 인류의 선한 진보를 믿는 측면에서라도 ‘조건 없이 기본소득’에 관심을 이제라도 보여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한국사회에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부조화는 어느 정도 상쇄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기업의 성장만이 국부(國富)라는 전제로 달려온 산업사회의 기만적 믿음은 노동의 현장에서 증명되어 왔으니까요.
2013년 11월 기본소득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이 운동에 대해 공부해 가는 중입니다. 최근까지 세계에서 기본소득 실험은 계속되어 왔습니다. 유토피아라는 토머스 모어의 상상에 머물 필요가 없습니다. 바티스 밀롱의 말처럼 현실적인 유토피아를 막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현재 기득권자들의 자리를 위협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사회제도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보편 복지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행정 비용을 더 지불하려 하는 보수당을 자처하는 국회의원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지금은 가능할 수 없겠죠.
민주주의가 민주주의를 헤치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지지한 국회의원들은 더 이상 나를 대의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수의 국민들이 정치인에게만 맡기는 것이 정치라는 시선에서 빠져나올 수만 있다면 제도로 정착될 사회 공론화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조금씩 관심을 가져 소리칠 수 있다면 언젠가는 모두에게 가능한 권리가 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기에 나는 또 꿈을 꿉니다. 야만과 폭력으로 이어지고 있는 사회에서 그나마 국가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남아있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