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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창우 Sep 01. 2018

사회적 타살이 부른 갈등과 위기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 / 빌 어거스트 감독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원작을 읽어 영화가 더 빛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였습니다. 고뇌하는 젊음을 공감하며 지나온 시간을 반추할 수 있게 하더군요. 시나브로 싸한 통증이 밀려오기도 합니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원작으로 한 영화로 가 봅니다. 영화를 본 후 책을 읽었기에 그 기억이 어느 정도 뒤섞였을 가능성을 미리 말합니다.  



 주인공 그레고리우스의 손에 들린 책의 저자 아마데우는 특별한 학생이었습니다. 그 특별함이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가에 따라 개인의 판단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나는 보이지 않는 영혼의 힘을 느꼈다는 것에 의미를 둡니다.

             

 저는 성경의 강력한 말씀을 사랑합니다. 언어의 부패와 독재의 쓸모없는 슬로건에 맞서기 위해서 성경 구절의 힘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제가 살고 싶어 하지 않는 또 다른 세계가 있습니다. 독립적인 사색이 경멸당하고 마치 죄인 양 비난당하는 세계입니다.     

독재자, 압제자, 암살자로부터 사랑을 강요받는 세계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조리한 것은 이 사람들을 용서하고 심지어 사랑하도록 강요하는 종교입니다. 이게 바로 성경을 그냥 옆에 둘 수 없는 일입니다.          

……          

저는 대성당이 없는 세계에서는 살고 싶지 않습니다. 대성당 창문의 빛이 필요합니다. 차가운 정적, 고압적인 침묵이 필요합니다. 신성한 단어들과 장엄한 구절들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 세계에 잔인한 모든 것에 대항하여 그만큼 저항할 수 있는 자유도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 없이 사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아무도 저에게 선택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영화 중, 아마데우의 고등학교 졸업식 연설-          


    


 오랜 시간 고전문헌학을 강의하며 혼자서도 잘 살아온 ‘그레고리우스’는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 우연히 다리 위에 서 있는 낯선 여인을 구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비에 젖은 붉은 코트와 오래된 책 한 권, 15분 후 출발하는 리스본행 열차 티켓을 남긴 채 홀연히 사라집니다. 그레고리우스는 강렬한 끌림으로 의문의 여인과 책의 저자인 ‘아마데우 프라도’를 찾아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오르는 거죠.  


 그레고리우스에게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은 내게 자주 일어나는 편입니다. 나는 어느 날 갑자기 그 모든 것을 뒤로 두고 떠나기도 했고, 모든 것을 정지시키고 일탈을 했지만, 내게 일탈은 일상의 다른 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게 두려운 게 무엇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미 그 두려움들과 거나하게 만취해 살아왔기에 두려움도 내  한 부분으로 녹아들어 가 있어서 남들과는 다른 무엇들로 비치나 봅니다. 무슨 상관인가요. 나의 두려움은 뜻밖의 시간에서 시작될 것이기에 이력이 쌓여 나타나 주면 이제 도망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레고리우스는 ‘아침의 나라’, 이 단어를 사랑했습니다. 나는 누군가가 평생을 사랑한 이 말로 호명되던 나라에서 태어났고요. 나는 이미 이 ‘아침의 나라’를 사랑하고 고요. 내 나라, 내 조국이란 말을 굳이 내비치지 않아도 나는 이곳을 떠난 나를 상상해 보지 않았습니다. 다만 사회적 타살이 부른 내 안에 일어나는 갈등, 이어지는 위기가 삶을 무기력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나에게도 돌아가고 싶은 시간이 있었던가 묻습니다. 이것 또한 내가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가끔은 과거로 돌아간다면 언제이냐는 질문을 받긴 합니다. 난 언제이든 그것이 어떤 빛으로 내게 손짓을 하건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전혀 나질 않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시간의 문이 있어서 언제이고 내가 떠나고 싶으면 도달할 수 있는 그곳이 있습니다만 이 사회를 돌아보면 절대 돌아갈 수 없는 시절입니다. 독주를 권하는 사회가 바로 여기입니다.     

    

 그레고리우스의 그 어느 날이 내게도 온 것인지 싶습니다. 내게로 온 한 편의 영화와 한 권의 책이 나를 부르고 있었고 그 부름을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일은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기운들로 이어져 있었거든요. 나와 또 한 사람과의 시간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시작됐고 진행해야 하며 이미 이끌리고 있다는 느낌이 가득합니다. 순조롭게 시간이 그곳을 향해 가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가까운 시간에 나를 그곳으로 이끌 것 같은 매우 강렬한 느낌으로 지금은 이렇게 있습니다.      

    

 나와 같은 생각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이가 영화의 주인공인 그레고리우스였습니다. 이게 우연이지 싶습니다. 하긴 이런 경우는 자주 있지요. 영화나 책에서 가상의 세계에서 나는 어떤 모습의 또 다른 사람으로 있을 수 있습니다. 내게는 다양한 종류의 인간이란 구분 외에는 딱히 구분될 것이 별로 없습니다.     


 가능하다면 편향성과 개인 간의 차이를 그대로 바라보려 애를 썼던 것 같습니다. 때로 나의 시선이 편향된 것으로 보일 때는 아마도 그 대상과 같이했던 시간과 친애로 인한 치우침이라 하고 싶습니다. 한 대상이 가진 단점보다는 장점을 더 선호하기에 가능했겠지요. 그렇다고 모른 척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모습도 인지하니까요.     

 

 나도 모르는 채 지나온 순간에 담겨 있을 모습을 타인들이 어찌 알아낼 수 있을까요. 결국,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으로 자기가 판단하고 알아진 대로 알고 있을 뿐이지요. 내게도 인생의 감독이 찾아온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집이라고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습관적인 일들이 다른 이들에겐 그렇게 비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 역시 그레고리우스처럼 잔소리할 이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은 큰 행운이었을까요.          


 누군가의 비밀을 단 한 사람만이 알고 있다면 그걸 가슴에 묻고 살아가기가 얼마나 무거운지요. 나는 이 비밀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데 떨쳐내고 싶은데 이 유일함을 내려놓고 싶은데 말입니다. 그 누군가가 있었으면 할 때가 있지요. 누군가 내 글을 읽고 내 삶을 추정하기는 불가능할 겁니다. 내겐 너무 많은 내가 늘 고개를 내밀고 세상을 만나거든요. 견딜 수 없는 우울함과 무력감에 음악을 들으면 모든 오감이 몰입되어 눈물을 흘려야만 하는 사람이기도 하니까요.          


 냉정 함이라곤 자신을 단속하는 데에 몽땅 쓰곤 했습니다. 그게 더 편했기 때문입니다. 사람 관계에서 덜 다치거든요. 내가 아픈 나를 바라보는 일, 그것들은 자초한 것이지만 그걸 즐겼다고나 할까요. 나의 선함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었을 지도요. 내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한 사람. 가능하다면 그 사람은 멀리 있어 주는 것이 좋습니다. 함께 하지만 거리는 멀고 아주 가까운 듯이 교감하는 대상이면 합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바라보아도 그 대상은 아닐 수도 있다는 일, 슬프지요. 나는 더 효율적인 일과 좋아하는 일을 선택해서 집중하지 못하거든요.


네, 슬픈 일입니다.      


         

 이 영화에서 아마데우는 스스로 묻습니다.          

누군가에게서 얻을 수 있는 이익에만 관심 있는 게 아니라 정말 누군가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도 있을까?
            

 이익이라? 참으로 낯설게 들립니다. 자신을 스스로 파괴하는 분노는 너무 많은 힘을, 시간을, 사랑을 가져갑니다. 내가 분노라는 감정에 휩쓸리지 않을수록 나는 조금 더 나의 시간을 차지하게 됩니다. 누군가가 나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그런 누군가가 다가오면 벽을 만들었던가 싶습니다. 아니 더는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단절을 해버렸던 적도 있습니다. 난 이해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영화는 나와 같은 마음과 시간이 많이 겹쳐져 있습니다.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이 사회에서 갈등과 위기는 내 안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닌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이 사회가 나를 죽음으로 몰고갈 위험 사회라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사회적 타살로 문제를 바라보아야만 하는 누군가가 선택해야만 했던 자살. 그 어느 나라보다 앞지른다는 자살 통계는 왜 국가 정책에 반영되지 않는 것일까요.     


“내 영혼아, 죄를 범하라. 스스로에게 죄를 범하고 폭력을 가하라. 그러나 네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나중에 너 자신을 존중하고 존경할 시간은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한 번, 단 한 번뿐이므로, 네 인생은 이제 거의 끝나가는 데 너는 살면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고, 행복할 때도 마치 다른 사람의 영혼인 듯 취급했다... 자기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서 이 구절들이 내 삶을 점령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더군요. 영혼의 떨림을 느끼고 움직이는데 두려워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삶에서 불행이란 말을 잘 생각해내지 못했나 봅니다. 아니면 내가 기억하고 싶은 기억만 하려는 무의식이란 장치로 가두어 두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주절거리며 쏟아놓을수록 푸념 같기만 합니다. 아마도 가을이 가까이 있기 때문일까 싶습니다. 계절 탓이 가장 무난하니까요.                    


 한국사회에서 잠시 뜨는 현상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뜨는 것’의 힘은 밖의 힘에서 비롯된다고 이어령은 『젊음의 탄생』에서 말합니다. 1945년 해방정국에서부터 내부의 동력이 아닌 외부의 힘으로 끝없이 움직이던 사람들, 급성장을 위해 한강의 기적으로 ‘뜬’ 대한민국은 추락했습니다. 성장 동력의 힘이 사라진 것이지요.  


 소진된 동력. 빠르게 달려가는 사회적 속도에 익숙해지면서 준비되지 않은 개인과 국가 내부의 동력은 쉽게 한계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라는 이식된 체제에 잠시 ‘뜬’ 87 항쟁까지 한 세기도 못 가서 잃고 말 뜨는 민주주의는 이제 정신을 차려야 할 것 같거든요. 여전히 ‘민주주의’를 외치는 한국사회에 사람은 없고 제도만 있으니까요.


아마데우의 비문 “독재가 현실이라면 혁명은 의무이다”


 영화를 본 후 써 놓았던 글을 다시 꺼내 듭니다. 이 은 몇 가지 개인적인 일과 공적인 일이 중첩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평소 마음이 어지러울 때는 책을 펴곤 합니다. 최근 내게로 온 사사키 아타루의 『이 치열한 무력을』입니다. 삶의 시간 저편에 여전히 굳건하게 박혀 있는 것들을 꺼내게 만든 시인 “프리드리히 폰 실러”의 “예술 철학”을 여기에서 만납니다.         


 잠시 그의 이론을 소개해 봅니다. 이것은 사사키 아타루의 책에서 그의 표현과 설명에서 인용합니다.    

      

프리드리히 폰 실러는 베토벤 교향곡에 쓰인 “환희의 송가”의 시인. 실러는 ‘순환’의 사상가이자 칸트에게 큰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그에게서 탈출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사고의 명석함도 잃지 않았던 철학자이다.       

실러는 어떤 변혁을 기획하는가?          

진정한 “보텀업”에 의한 정치 변혁은 "인간을 고귀”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만 실현된다. 하지만 이는 현존하는, 최종적으로는 “톱다운”에 의한 개개인의 “억압, 폐기”라는 수단을 취할 수밖에 없는 “야만적인 국가 기구”에서는 실현할 수 없다. “국가가 부여한 것이 아닌”, “어떤 정치적 부패가 있어도” 가능한 수단, 실러에 따르면 그것은 “예술이다”.         

그의 예술 철학은 프랑스혁명이 ‘허무한 바람’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를 논하고 있다. 즉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나중에는 “위로부터의” 혁명으로 변질하면서 어떻게 해서 실패하게 되는가, 라는 문제를 논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순환’을 발견한다. 이 순환 속에서 개인과 국가가 어떻게 하면 합치할 수 있는지, 그 조건을 찾으려 했다.     

     

 결과적으로 실러의 이론은 현재 유효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의 이론이 성공하기 위해서 개인과 국가 간에 모순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 전제되거든요. 이 점에서 저도 그와 같은 생각입니다. 87 항쟁의 미완성이 좋은 사례가 됩니다.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나중에는 “위로부터의” 혁명으로 변질되면서 실패했기에 30년 가까이 “민주주의”를 외쳐야 했으니까요.        


 전명산의 ‘문화 현실 분석’에서 개념을 인용하여 설명하면 방법을 달리해 접근하여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푸코의 판옵티시즘적인 공간과 정반대의 공간인 장 프랑소와 누벨이 만들어낸 홀롭티시즘에서 개인들은 공동체 전체를 볼 수 있습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과연 공동체를 바라보는 시선이 가능한지요. 국가의 성장이 분배 정의를 찾아내고자 노력하고 집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광장에서 소리쳐야 합니다그들은 소리 내지 않으면 귀 기울이지 않으니까요. 더 크게 그야말로 샤우팅.


 “홀롭티시즘”은 어떤 조직 혹은 그룹 내의 행위자들이 조직 혹은 그룹이 물리적인 공간이든 혹은 온라인 공간이든 전체를 마치 하나의 개체인 것처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홀롭틱한 공간은 각각의 참여자들이 ‘전체’를 생생하게 지각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한 것이죠. 갈등과 위기로 마지막에 선택하는 자살은 타인을 의식하며 판옵티시즘적인 공간에 홀로 안주하는 것이 차라리 좋은 선택이라 여겨서 일까요. 사회가 만들어 놓은 구조가 부른 죽음일까요.      


 쌍용자동차 노동자 대량 해고 문제가 1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지난 6월 27일, 쌍용차 해고노동자 김주종 조합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쌍용차 해고와 관련해 서른 번째 죽음입니다. 사회적 타살이 부른 한국사회의 갈등과 위기는 정부의 관리능력 상실, 정책 실패, 부패한 정치인과 관료들. 집권세력이 바뀌어도 갈등과 위기는 또 다른 모습으로 진행 중입니다. 현 정부의 내각 개혁을 보면 참으로 쉽게도 가려한다는 생각을 멈추지 못하겠더군요.    



 

 사람이 도구로 전락한 곳,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삶은 주어진 운명같이 내게로 왔지만, 그것을 채워가는 시간은 순전히 자신의 몫으로 남아있나 봅니다. 하지만 죽음 또한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인간에게 주어진 순간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머문 사회의 제도, 갈등과 위기로 한 개인을 죽음으로 몰고 갈 사회적 타살은 아니어야 합니다. 온전한 나의 삶을 위해 제대로 작동될 민주 공화국이어야 합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아마데우와 실러와 사사키 아타루,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나도 공감하는 부분은 결국 “혁명은 고귀한 영혼에서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이겠네요. 사사키의 말을 빌려 우리 하나하나가 스스로 바뀌어야 한다면 가장 좋은 수단은 실러가 말한 세 번째 아티스트인데 굳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하는 이유는 예술에서만 감성과 우연성, 이성과 필연성이 일치하기 때문이랍니다.       

        

하지만 나는 삶이 예술로 불리는 날을 희망합니다. 혁명이라는 정신이 허무한 바람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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