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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창우 Sep 15. 2018

그대는 소수자가 아니신가요?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 / 구스 반 산트 감독

 사전적으로 ‘소수자’는 ‘적은 수의 사람’ 일 뿐이죠. 하나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는 단지 그 의미만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의미가 전복되는 경우는 넘칩니다. 그럼에도 일반적으로 지칭할 때, ‘소수자’라 하면 부정적 뉘앙스를 풍기죠. 장애인, 동성애자, 비혼모 등등. 하지만 또 다른 소수자도 분명 있습니다. 이제 편협한 개념을 떨칠 때입니다.


 청소년용으로 1등급, 분명 소수자입니다. 대학생용으로 명문대, 직업별로 성공신화의 주인공들인 소수의 기득권자들까지. 그들도 분명 소수자이죠. 그다음은 너절하게 늘어놓지 않아도 유추해 나갈 여지는 많으니까요. 1%의 부를 가진 자들이 다수자는 아니잖아요. 하고 싶은 말로 들어가 보기 위해 ‘소수자’로는 연관 검색어로 뜨지 않는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 Finding Forrester>를 통해 이어가려 합니다.    


      

                           

1. 과연 영화의 주인공은 소수자일까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작품 <파인딩 포레스터>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소수자입니다. 열여덟의 소년이 보여주는 농구 선수로서 탁월함과  문학적 재능, 은둔자로 살아가는  50년 전 전설적인 데뷔 소설을 발표한 후 모습을 감춰버린 작가 윌리엄 포레스터입니다.


 길거리 농구를 즐기는 고등학생 지멀 월러스와 그의 친구들은 동네 아파트에 거주하는 이상한 남자에게 관심을 갖습니다. 호기심으로 지멀은 그의 아파트에 침입하지만 뜻밖의 상황에 놓여 가방을 놓고 나오게 되고요. 그 집의 주인공 포레스터는 침입자가 미처 챙기지 못한 가방을 보게 됩니다. 그 안에서 발견한 습작 노트에서 평범함을 뛰어넘는 지멀의 수많은 글을 만납니다.    


 다음 날 지멀은 그의 창문에 걸린 자신의 가방을 발견하지만 가방을 찾기 위해 아파트를 오르지는 못합니다. 가방은 창 아래 길바닥으로 떨어지고 자신의 에 쓰인 빨간색의 글씨를 발견하고 지멀은 포레스터를 다시 찾아가게 돼죠. 지멀은 브롱스를 벗어나 스카우트되어 (지멀의 표현으로 콤마가 두 개인 최상류 층이 많은) 사립고등학교의 농구 선수로 활약하게 됩니다. 분명 지멀은 그곳에서 낯선 자로 ‘소수자’입니다. 이런 영화에서 사회적 환경은 우리나라에서도 그리 다르지 않게 드러나고 있는 모습이기도 하고요.      


 우리의 현실, 특목고와 자사고 등, 이미 고등학교에서 교육의 평등선은 사라졌습니다. 부모의 부(富)가 자식으로 대를 잇게 되는 ‘지배블록’이 굳건해지고 있으니까요. 일반고에 비해 자사고가 누리는 기득권도 소수자가 누리는 시혜입니다. 이것은 인권 침해라거나 생존 위협을 거론하는 ‘소수자’로서 만날 공포감은 결코 아니지요. 이런 경우는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소수자가 되네요.   

             

 지멀의 호기심의 시작으로 알게 된 은둔자 포레스터는 개인적인 상실의 아픔에서 스스로를 가두며 세상과 거리를 두고 지내던 저명한 작가로 그 또한 ‘소수자’입니다. 그 둘의 만남이 서서히 진행되면서 때 묻은 고전 서적들과 정적만이 가득했던 포레스터의 은둔지는 두 대의 타이프라이터의 소리와 웃음, 논쟁, 학문에의 열정으로 채워집니다.


 두 명의 소수자가 만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나누고 있는 모습은 어쩌면 눈에 드러나지 않을 뿐, 우리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누군가의 일상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소수자들의 만남은 삶을 향유하는 데 최고의 선물이기도 한 거지요. 포레스터는 이 소년을 따라 지난 40여 년간 닫고 살아온 창 밖의 세상과 조금씩 조우하게 됩니다. 그 후 지멀은 포레스터에게 문학을 배우고 교감하며, 포레스터는 지멀 덕분에 세상 밖으로 한 발짝 내딛는 용기를 배우게 됩니다.

                  


2. 소수자의 분류 기준은

     

 영화에서 저는 우리 사회에서 답습되고 있는 많은 관습적 사고를 만납니다. 소수자로 주류가 되는 인생들과 소수자이기에 비주류로 분류되는 삶은 어떤 기준이 있기에 가능하게 인식되어 왔던가에 주목니다. 늘 힘 있는 자들의 발언권이 우선시되었던 인류사에 물을 수밖에 없는 거겠죠. 역사를 만드는 일은 지금 가능한 선택에서 축적되는 것일 텐데요.      


 주류와 비주류의 분류마저도 언제, 누가, 왜, 만들어 놓은 것인 지 출처는 분명하지 않았죠.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별 거부감 없이 사용되는 주입된 언어들, 편협한 개념으로 익숙해져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상위 1%의 부자들에게, 또는 1등급을 맞은 학생들에게 결코, 소수자라고 명명하지는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소수자에 대한 편견은 다수에게 부정적인 의미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거든요. 하지만 소수자이기에 받아야 하는 부당한 일들을 생각해 보면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개인으로서 희생을 해야만 하는 ‘경우의 수’가 너무 빈번한 것을 발견합니다. 소수자라는 명명으로 개인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기도 하니까요.


 현대인의 소외는 공동체 해체 야기되어 왔습니다. 기본 단위의 가족에서부터 친구, 직장, 학교 등의 공동체에서 단지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목숨이 죽음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일상의 고통은 ‘불편한 진실’이 되어 암묵 속에 놓여 있고요. 미래를 향한 꿈을 꿀 수 없는 이들이 너무 많아지는 사회, 알 수 없는 공포에 자기를 추스르기 힘든 이 곳에서 저는 어떤 희망을 말할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3. 영화 속 인물과 대화    

 

영화에서 포레스터는 지멀에게 묻고 답합니다.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뭔지 아니?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거지. 우린 이해가 안 되면 가정(假定)을 하게 된단다.”     


 우리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한 개인이 놓인 사회적 환경에 의해 그를 판단해 버리는 오류를 아주 쉽게 저지르며 삽니다. 그 가짜 논리에 의해 진행되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사회적 자아에 길들여지고, 관계를 맺게 하여 그것만이 성공적인 삶인 것처럼 꾸며낸다는 것이죠. 개인적 자아는 실종되어 ‘내가 누구지?’라는 끝없는 질문을 허공에 되뇔 뿐.     


 더 이상 진실을 알고 싶어 하지 않을 만큼 시간이 지난 뒤에 자각을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되고 맙니다. 여기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소수자는 구분되는데 합리적 이성을 강조한 ‘공리’와 ‘편견’이 근거로 자리 잡아, 다수의 행복을 위한 소수의 희생을 당연시하게 만들어 왔던 거죠.          



 브롱스라는 나쁜 환경에 놓인 소년의 문학적 재능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선생은 결국 지멀의 글에 문제 제기(포레스터의 글 제목을 도입으로 쓴 것)를 하고 지멀은 글의 출처에 대한 해명을 요구받게 됩니다. 즉 스스로 쓴 글이 아니 것으로 간주되어 학교에 남을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려 하는 거죠. 지멀은 그 학교에서는 소수자거든요.   

       

 “자네에게 제안을 하겠네. 이젠 모든 걸 잊고 내년에는 학업계획이 좀 느슨하게 짜일 거야. 자네가 할 일은 이번 토너먼트에서 승리를 안겨다 주는 거지. 그것만 해 내면 내가 알아서 하마.”         


 포레스터의 글을 인용한 것에 대한 해명을 할 수 없는 지멀. 포레스터와 한 약속을 저버려야 가능할 학교에 남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농구시합에서 우승하는 것. 하지만 동점이 될 수 있는 자유투를 얻은 지멀은 (의도적인 듯) 실수로 득점을 하지 못하고 학교는 승리할 수 없었죠.      


 지멀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회를 위해 그들이 원하는 승리로 이용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인생에서 마주할 절호의 기회라는 것은 행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스스로를 불행하게 하는 것일 수도 있었죠. 지멀은 자신의 성공보다는 포레스터와의 약속을 지키는 ‘우정’을 선택했습니다. 그런 지멀을 돕기 위해 학교로 나온 포레스터는 지멀이 그에게 건넨 글을 읽습니다.


 자신에게 도움을 준 친구를 돕기 위한 포레스터의 선택이었습니다.


 


“가족을 잃게 되면 가족의 의미에 대해 알게 됩니다. 피를 나눈 가족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가족을 말하기도 하죠. 우리가 지혜롭게 이들에게 마음의 문을 연다면 그들에게 품었던 소망... 마지막으로 어떻게 했어야 하는데..라고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영화 속 지멀의 글을 들으며 ‘나의 지멀’에게 전하고 싶네요.    

 

그대를 잃고 나서 후회의 마음에 시달리기보다는 그대를 잃지 않기 위해 나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는 거. 그대를 지켜줄 수 있음으로 나도 살아날 수 있다는 거.
그렇기에 그대는 내가 부를 이름으로 온전한 ‘그대’로 있으면 되었다.



4. 소수자인 나와 너의 세계  



 다수에 속하지 않는 의미로 일반화될 수 없는 이들을 내 나름대로 소수자라 표현해야 한다면 나는 분명 소수자인 거 맞습니다. 와 같은 삶을 추구하는 이들이 적기에 소수자로서 이 사회에서 제도와 무지와 편견으로 요구하는 개인의 희생을 당연히 거부합니다. 그래서 나는 함께 나누고 싶은 그대의 희생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한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어떤 상황에 놓인 부분, 그만큼의 이해는 가능하죠. 그 부분으로 한 개인의 삶을 온전하게 알아자리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그렇기에 ‘느껴주기’로 그 대상에 대한 이해를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느낌을 나눌 수 있는 대상과 교감을 통해 친애와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라고. 영화 속에서 지멀과 포레스터의 교감이 ‘우정’이라는 친애로써 스스로 삶에 당당하게 맞서 나아갈 힘을 준 것처럼요.      


 인간의 다양성에서 시작되는 삶의 모습들, 또한 사회 각 분야에서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구분되어, 늘 소수자로서 받아야 하는 부당함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나’에게서 시작될 수 있었고 ‘그대’로 하여 이어지기도 합니다. 상대적 박탈감을 ‘제도’라는 것으로 은연중에 만들어내고 있는 이 사회에서 소수자라는 ‘구분’이 사라질 때 우린 비로소 ‘인간’으로서 대등해질 수 있을 겁니다. 이 사회에서 ‘소수자’는 나이기도, 또 그대이기도 하니까요.


 사회에서 한 개인으로 사는 것이 불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비상식적인 일들은 적어지겠죠. 참사가 일어나도 책임지지 않는 나라, 세대를 가리지 않고 발생하는 자살이 넘치는 사회,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어린이가 많은 사회, 기계와 벗 삼아 놀아야 하는 청소년이 대부분입니다.


 굴뚝 위로 올라간 노동자들의 아우성, 내가 사랑하는 그대가 같은 성(性)이라는 이유로 모멸의 대상이 되는 사회입니다. 그대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건넬 수 없는 나, 내 옆의 가족들 뒷모습만을 응시해야 하는 TV가 있는 저녁을 맞는 이 사회에서 인간의 행복을 말하기는 버겁기만 합니다.


하지만
희. 망. 하. 기. 멈출 수 없어요.   
우리는 모두 소수자 이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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