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선전화가 울리는 일은 아주 드물지만 벨 소리가 우렁차게 울릴 때면 신기하다. 일상이 휴대폰으로 진행되던 서울을 떠나자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휴대전화가 방치되고 있다는 점이다. 책방 밖으로 나갈 때나 일부러 챙겨야만 하는 휴대전화가 어느 구석에 있는지도 잊고 있다. 없어도 상관없는 물건이 되어 버리다니.
새 학기가 시작되어서인지 책방 전화가 자주 울린다. 책이 있는지 묻는 전화인데 모두 학습참고서나 공무원 수험서 들이다. 그런 것은 안 팔아요 하려다가 무례한 것 같아 없어서 죄송합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혼자 웃는다. 신간 들어왔나요? 이런 전화가 오지는 않을까 염려하며 처음 책방을 열 때 눈길도 주지 않는 베스트셀러 책을 준비했다. 나라도 읽어 주어야 할 책이지만 눈길도 주지 않는다.
독서모임 회장님이 들러서 가끔 시집을 주문하신다. 그 덕에 나도 읽어볼까 싶어 여유로 더 구입하면서 시집을 펼치는 일이 요즈음 즐거운 일이다. 회장님은 일흔을 맞아 삶을 정리한 것이라며 출간한 시집 <<홍시>>를 선물로 주셨다. 부끄러워하는 회장님 얼굴은 발갛지만 이미 시인인 걸 어쩌나.
나와 시인이 같이 있다. 뭔가 일어날 수 없는 일도 가능한 곳이 어쩌면 책방이라는 공간인가 해서 마음까지 울렁인다. 시집은 비매품이라 책방에서 팔 수도 없는 귀한 작품이다. 시를 읽고 있다 보면 가끔 나도 시인이 되고 있다는 꿈을 꾸기도 한다.
재인 씨도 만나는 사람 있어요?
빙그레 웃으며 회장님이 묻자 나는 웃으며 못 들은 척해버린다.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해서 그런지 늦게까지 혼자 살고 있는 젊은이들 보면 부러워요. 그래도 연애는 해가면서 살아야 재미있잖아요.
그렇죠? 저도 연애를 해볼까 생각 중이에요.
여기로 와서 만났어요?
토끼처럼 동그랗게 눈을 뜨며 호기심이 넘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아니요. 여기서는 사람 구경도 못했어요. 친구인가 했는데 애인으로 바꿔볼까 하고요.
좋죠. 친구에서 연인으로 가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은 하는데 무척 어려운 일이죠.
우리 엄마가 늘 하던 말씀이긴 해요.
우리 시대에도 그런 일은 드물었던 것 같아요. 결혼은 그저 어른들이 좋다 하면 그걸로 충분했던 것 같긴 해요. 마음 애태우는 사랑놀이도 못해본 것 같고. 자유연애가 제일 아쉬운 마음이더라고요.
연애를 해볼까 하는데 내 마음을 전할 방법이 없어요.
아니, 요즈음 스마트폰으로 안 되는 게 어디 있어요?
제가요. 좀 구닥다리 연애를 해보려고요.
아, 연애편지로?
네, 어디 있는지 알 수도 없고 그림엽서로 안부를 전하는 게 다인데.
못됐네. 있는 데 알려는 줘야지.
여행 중이라 움직이면서 보내는 것 같아요.
그래도 그냥 써 둬요. 언젠가 여행에서 돌아오면 영화처럼 묶음 편지를 전하면 되잖아요.
그런 방법도 있긴 하네요. 그런데 아직 내 마음을 잘 모르겠어요. 보내는 사람 마음은 더더욱 모르고요.
재현이가 보낸 그림엽서로 마음 한편이 계속 울렁이고 있나 보다. 회장님 덕분에 숨어있던 감정이 실타래처럼 풀어져 나온다. 그런 마음이었나? 스무 살 이후 재현을 만난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전화번호가 아직도 전시회 1로 저장되어 있다. 1년이면 한 두 번 메시지로 주고받은 일, 묻지도 않는 말로 혼자 떠들다가 끝나던 기억. 군대 간다고 연락하고 다녀왔다고 연락하고 그게 전부인 것 같다. 오히려 정윤이와 더 편하게 연락을 해왔나 보다.
생각해 보면 타이밍이기도 하다. 정윤은 거의 내가 누군가 도움이 필요하다 싶을 때면 알아서 나타나는 녀석이다. 다른 사람이 만들어놓은 죽음이라는 덫에서 벗어날 수 없게 정윤은 충실하게 그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김없이 죽어버린 선배를 떠올리게 하니까.
수취인 불명 편지를 써볼까... 만약에 그림엽서가 다시 온다면 그때 생각하기로 한다. 오늘 밤은 현실세계에서는 그림의 떡일 뿐인 달달한 로맨스 영화를 보는 것으로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