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비가 내릴 것만 같은 흐린 하늘을 보고 자전거보다 걷기로 한다. 이제는 제법 멀리까지 나아간다. 가능하면 가보지 않은 길을 찾아 걸음을 옮긴다. 기분 좋게 만드는 낡은 고딕건축은 천주교 성당이고, 이 지역에서 제법 웅장한 건축물은 대체로 십자가가 높이 세워진 교회 건물이다.
과거 공간을 리모델링하고 식민지 착취에 증거물이 된 건축물은 어느새 문화예술공간이 되어 있다. 지역을 대표하는 역사성은 다른 이름으로 새 역사를 만들어간다. 아픈 과거와 연결되는 구조물이 긍정적인 역사의 산물로 남아질 수 있다면 좋은 변화다. 결국 바닷가까지 나오게 된다. 이쯤 되면 돌아가기는 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멀어진 바다를 보며 이름도 기억에 남지 않은 시인이 떠오른 순간. 그가 책날개에 적어둔 여섯 문장 중 두 문장을 기억해 낸다. 스무 살을 넘기려던 겨울방학, 도서관에서 제목만 보고 꺼내 읽었던 산문집. 시인이 산문집에서 욕을 대놓고 못하니 받침을 빼고 시바시바 하던 내용이다. 책장을 덮을 때 발견한 문장들이 지금까지 내 기억에 남아있다니. 시인에게는 미안하지만, 책 제목은 기억에 없다.
‥‥
사랑할 수 있는 것만 사랑하는 게 무어 사랑인가.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해야 진짜 사랑인 거지.
수취인 불명인 편지를 써 봐야겠다고 마음먹는 동안 대략 이런저런 헝클어진 기억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온다. 버스를 타고 돌고 돌아오니 여행길에서 보낸 세 번째 그림엽서가 우편함에서 삐죽 나와있다. 한 달 만에 도착한 그림엽서. 그는 서쪽으로 점점 멀어지고 있다. 시인이 적은 두 문장을 따라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해 본다면 진짜 사랑이 되기는 할까.
막상 그에게 특별히 하고 싶은 말도 없다. 여행이야기를 듣는 것 외에 할 말이 없다. 그림엽서를 받는 것이 특별한 기다림처럼 된 것 말고는 잘 모르겠다. 사랑하는 일이 마음먹는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이런 일이 얼마나 무모한지 생각해 본다.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일을 주도면밀하게 해가는 사람. 그는 나보다 더 치밀하게 자기 세계를 만들어가는 사람이다. 재현이를 떠올리면 우주 얼굴이 보이고 어긋나던 순간으로 가슴 아팠던 나날도 다시 생각난다.
나에게만 보내는 소식도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이제야 한다. 여기저기 그가 보내는 그림엽서로 기분 좋을 사람들을 떠올린다. 내 생각을 하면서 하기보다는 스스로 만들어가는 여행 의미로 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여행자에게는 그저 수취인 불명이 아닌 이 상태가 좋지 않을까.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그러라지. 사람 관계는 대충 이렇게 마음먹으면 상처받을 일도 줄 것도 없다. 어차피 혼자 걸어가는 길 위에서 바람처럼 스치는 이야기로 충분하지 않을까. 사랑할 수 없는 대상을 사랑하는 일은 그야말로 영화 같은 이야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