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중물 : 고소하고 노란 인절미처럼
가을 시작부터 마주한 책은 『엔데의 유언』이다. 이른 아침에 독서 시간은 오롯이 나를 지켜내는 시간이다. 두 번째 마주하고 있는 책은 『우리는 소박하게 산다』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이다. 이상하리만치 현재와 이어지는 관심이 우연하게 시선이 닿는 책은 내게 용기와 격려를 담고 있다. 삶의 전환은 요란하지 않게 열린다.
아주 작은 설렘으로 맞은 가을로 꽉 찬 하루를 보내는 첫 주가 되었다. 폭염이라는 두 글자가 일상에서 익숙해질 즈음 여름은 그렇게 사그라들고 말았다. 그야말로 하루 하침에. 달력의 숫자가 바뀌면서 아침 바람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여섯 명으로 출발한 첫날 모임은 인절미가 앞에 놓여있다. 배가 고팠던 나는 노란 콩고물에 덮인 인절미를 웃음 한가득 흘리며 씹어먹는다.
회장을 맡은 사람의 준비하고 있는 마음가짐이 드러난다. 도움이 될 여러 자료들을 찾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짚는다. 한 사람의 열정을 발견하는 일은 유쾌하다.
공부모임의 이름도 만들고 모임 횟수와 모임의 목적에 맞는 열린 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한 시작을 의논한다. 도움이 되고 관심을 가지고 있는 마을주민은 누구나 같이 할 수 있다는데 의견을 모은다.
지금 여기부터 한 걸음 내디뎌 나아갈 마음가짐이 담긴 공부모임으로 그렇게 ‘마중물’로 탄생한다. 정기적인 모임으로 같이할 마중물 모임은 동아리 정관과 회칙을 준비해 다음 모임 때 회의를 통해 고유번호증을 만들어 동아리로 등극할 예정이다.
21세기가 막 열리던 시절이 어느새 20여 년이 지났다. 그 시절 들썩였던 시민사회운동은 꽃을 피울 수 없었다. 사회분위기는 그 시대를 반영한다. 그 시대가 계속 이어지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한 것은 아니었나 싶은 성찰의 시간을 놓지 말아야 했나 보다. 현재까지 소소하게 드러나지 않게 이어지고 있는 그 운동의 씨앗은 말라비틀어져 버석거리지만 생명을 다하지는 않았다.
씨앗을 품고 언제든 다시 시작해보고자 하는 진실한 마음으로 씨앗을 뿌리고자 하는 사람이 남아있기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오늘이 열린다.
사람의 목소리는 멀리 가다 잠시 멈추기도 한다. 견고한 벽이 가로막을 때는 메아리로 다시 돌아오기도 하지만 그 목소리를 낸 사람은 여기 그대로 서 있기에 여럿이 그 벽을 뛰어넘어 볼 용기를 다시 낼 수 있는지도 모른다.
인절미를 꼭꼭 씹어먹듯이 마중물은 체하지 않고 잘 소화해 나가며 개인의 가치를 모아 마을 공동체의 마중물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게 하는 첫 모임이다.
단지 단톡방을 통해 형성되는 모임이 아니라 지역 곳곳을 걸어 다니며 마주하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만남, 그 너머를 생각한다. 온라인에서 이루어지는 표준화된 이야기가 아니라 모두의 가슴에 품고 있는 개인의 삶을 나누는 사람이 모여 눈 맞추는 공간을 꿈꾸고 있다.
꿈은 꾸고 있는 사람만의 것이라던 자조 섞인 충고가 들리는 듯하지만 나는 오늘도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