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창우 Aug 17. 2016

내게 주어진 삶을 홀로 감당할 수 없는 시간이 온다면

[인생 복습 ⑦] 장수(長壽) - 오일러의 공식

 

 한 인간으로 잘 태어나는 일도 자기 뜻은 아니지만 잘 죽는 것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다. 그런 의미로 접근한다면 내 의지로 살아갈 수 있는 시간만큼은 그리할 수 있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이치 아닌가. 그런데도 내 뜻대로 살아오지 못한 시간이 더 많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제 이십 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노년을 지내고 싶은가를 물으면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   

  

 시몬느 보부아르는 ‘나이 듦의 의미와 그 위대함’을 부제로 쓴 『노년』에서 붓다가 출가하기 전 왕자였을 때 첫 번째 궁 밖 나들이에서 마주친 노인을 만난 이야기를 한다. 병들고 이는 다 빠지고 주름살투성이에 백발이 성성하며 꼬부라진 허리로 지팡이에 몸을 지탱하고 서 있는 그 사람은 떨리는 손을 내밀며 무어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여댔다. 깜짝 놀란 싯다르타는 사람이 늙어 노인이 되면 그리되노라는 마부의 설명을 듣고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오, 불행이로다. 약하고 무지한 인간들이 젊음만이 가질 수 있는 자만심에 취하여 늙음을 보지 못하는구나.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 놀이며 즐거움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지금 내 안에 이미 미래의 노인이 살고 있도다.”    

 

 싯다르타이니까? 도(道)나 닦으러 가자는 말은 아니었다. 그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결코 아니다. 그래, 이 세계는 오래오래 지속하면 좋을 것들이 참으로 많다. 거듭되는 좌절과 절망에 다다를 때도 우린 이런 말을 하지 않던가. 그래도 삶은 살아볼 만 해.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 너무 많다고. 나의 시선에 담을 수 없는 세상이 얼마나 넓은 데 말이야.     


하지만 장수하는 노인에게는 반드시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가 한 명은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는 받아들일 수 있다. 육체적 쇠락은 경험적이며 보편적인 것이니 독립적 생활은 거의 불가능하다. 장수할 수 있는 보살핌이 필요충분조건이어야 한다는 거겠지. 사람의 나이 ’ 99세’이면 ‘백수(白壽)’라 한다.    

 

     


 이누도 잇신 감독의 영화 <시니 바나>의 장수원에서는 ‘백수’를 축하하는 파티가 열린다. 두 젊은이에 의지해 휠체어에서 겨우 일어나 축하하기 위해 모인 노인들에게 인사를 한다. 문제는 백수를 맞은 그 노인이 결코 편안해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 영화의 끝 부분에서는 그가 백수를 누리고 있기에 얻을 수 있는 소중한 순간을 맞는 기회가 있음을 보여주기는 한다. 나는 장수를 누린다는 것이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위키백과에서 장수(長壽)는 생명체가 오래 사는 것을 뜻하고 보통사람이 평균 이상의 삶을 누리다 죽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하지만 영어 ‘longevity’로는 생물이 장기간 살아 있는 상태 또는 그러한 능력’으로 살짝 다르게 다가온다. 한 번 태어난 세상이니 오래오래 살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홀로 발휘할 수 있는 능력 없이 오래 산다는 것에만 의미를 둘 수는 없을 것 같다. 물론 개인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너무 일찍 떠나게 되는 사람도 있고 자살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으니 생명유지의 시간의 길고 짧음에 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고령화 사회로 가고 있는 한국에서 노인 복지정책은 너무도 미흡한데 여기에서 ‘장수한다’는 의미는 소수의 노인층 외에는 고통스러운 삶으로 전락할 노년기로 되리라 충분히 예측할 수 다.   


    


 고이즈미 타카시 감독의 영화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서 내가 평소에 생각하는 장수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부여할 수 있었다. 비록 기억력이 한정된 시간일지라도 그 기억의 연속성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박사는 세상의 모든 것을 숫자를 통해 풀이하는 수학자인데 사고로 인해 80분밖에 기억을 유지하지 못한다. 박사는 매일 아침이 첫 대면이고, 언제나 숫자로 된 인사를 반복해서 나눈다.   

  

 박사는 숫자와 사랑에 빠져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그를 돌보는 가정부 쿄코에게 집에서 기다리는 10살 된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걱정하며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들도 집에 들르도록 하고, 루트(√)라는 별명을 지어준다. 혼자서 아이를 키우던 그녀와 박사는 마음을 나누며 서로 의지할 수 있는 관계가 되고 ‘돌봄 공동체’로 그들은 즐거운 시간을 함께 한다.

    

훗날 “함께 나눈 시간 그대로이면 충분했다”는 수학 선생이 된 루트가 학생들에게 수식을 설명하는 말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다.  

   

博士の愛した數式 : 오일러의 공식

     


 오일러의 공식이 여러 개라고 하는데 숫자로 이해할 수 없는 나의 무지함은 인정하고, 이 오일러의 공식을 영화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오일러는 무관계로 밖에 보이지 않는 수의 사이에서 자연스러운 연결성을 발견한 것으로 이건 마치 어둠 속에 빛나는 한줄기 아름다운 유성. 들에 핀 한 송이 꽃의 아름다움. 그런 것들을 설명하기 어려운 것처럼 이 수식의 아름다움은 설명하기도 어렵죠. 하지만 박사님은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박사님이 사랑한 수식입니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장수’에 대입시켜 본다면 장수는 하루하루가 새롭게 시작되는 시간으로 유지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결국, 세대 간의 조화로움, 노년의 시간대에 함께 할 주변인의 마음이 장수의 비결이 될 수 있다는 거다. 하지만 때로 너무 오래 산다는 것에 두려움을 만나는 순간이 있다. 젊은 시절 나에게 주어진 삶을 홀로 감당할 수 없는 시간이 오는 그때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동안의 삶이 나의 노년을 채워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알아가는 일, 그것이 삶이기도 하니까.


이제 그만.

 멈출 수 없는 시간 위에서 지금을 제대로 살아가는 일이 노년을 준비하는 시작이라면 삶이 너무 지루하려나. 이십 대에 누린 삶의 영감으로 노년을 맞을 수 있다면 이승을 떠나는 마음을 가볍게 해 줄 수도 있겠지. 아직 오지 않은 내일보다는 오늘 잘 살아내려는 일이 소중한 이유가 되는 것 처럼.


 




이전 07화 삶에 이미 결정된 것은 없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