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창우 Sep 13. 2016

삶에 이미 결정된 것은 없다

사랑에 대한 모든 것 / 제임스 마시 감독



 나는 천재형 인간을 좋아한다. ‘천재’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이 천재형 인간은 얼마든지 시대와 사회적 환경에 따라 가능하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도 이런 인간이 있는데 감탄사가 절로 터진다. 물론 전제되는 것은 천재형에 가까워지기 위해선 분명 일반인과 다른 무엇이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을 나는 ‘재능’이라고도 하고 ‘꾸준함’이라고도 말한다. 지능이 높다고 해서 반드시 천재형 인간일 수 없다는 의미이다. 어린 시절부터 그가 놓인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영향부터 시작해서 결국은 자신이 천재형으로 나아가기 위한 삶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천재는 태어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는데 굳이 그것에 반론할 생각은 없다. 그럴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천재형’은 결코 선천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개인의 의지가 깊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어떤 분야에 몰입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낸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렇기에 천재형으로 살아갈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고 하겠다. 한국사회에서 천재형이 드문 것은 사회적 환경이나 제약이 높아 그것을 뛰어넘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순종형이 너무 많이 길러진 탓도 있다. 튀면 힘든 사회이니까.  


    



 아인슈타인은 양자론에 대해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 말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스티븐 호킹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즐길 뿐만 아니라 주사위를 인간이 찾을 수 없는 곳에 던져버리는 고약한 존재”라고 말한다. 내가 주사위를 찾을 수 없다면 내가 알 수 없는 수많은 외부요인에 의해 미궁에 빠져 길을 헤매게 된다는 거다. 내가 주사위를 던질 수만 있다면 최소한 여섯 가지의 선택이 내 앞에 놓인다. 그중 하나로 결정되어 나타나지만, 그것 또한 내가 선택하는 것이 되는 거다. 삶에 이미 결정된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력에 대한 위대하고도 혹독한 니체의 실험도 주사위가 매개였다 한다. ‘네 운명의 주사위를 사랑하라(Amor fati)’는 운명에 순응하여 이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내 의지로 이끈다는 의미이다. 주사위를 던져 나온 한 면을 선택했다는 것이 불확실성에 내던져진 삶이라 해도 내가 주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선택에는 ‘필연성’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과를 미리부터 두려워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내 삶의 새로울 가능성은 없게 된다. 그렇기에 현재를 살아간다는 것은 매 순간 내게로 밀려오는 시간과의 사랑 나누기이기도 하다.      


  물리학도와 인문학도의 만남은 기적 같은 일을 만들었다. 그 기적은 사랑의 힘이었다. 인류를 현재까지 지탱하게 해 준 힘, 그것은 사랑이었다. 인간과 인간, 자연, 그리고 공동체의 존재감의 원천은 마르지 않는 사랑이라는 샘이었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세상을 변화시켜 왔다고 믿는다. 자신의 삶을 바꾸는 것, 타이밍이다. 그 순간의 선택이다. 인류라 일컫는 우리들의 삶의 궤적을 마주할 '시간의 역사'가 스티븐 호킹에 의해 글로 쓰였을 때를 기억해 본다. 그 거대한 우주와 함께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황홀하던지. 나는 아직, 그 황홀함을 잊지 않고 있다.     


 호킹은 퇴행성 신경 질환, 일명 ‘루게릭병’으로 시한부 인생 2년을 의학적으로 선고받지만 현재에도 여전히 괴짜 같은 유머러스함과 긍정적인 면모를 잃지 않고 있다. 그에게는 기적 같은 일을 만들어낼 위대한 힘이 있었다. 제인의 사랑이 없었다면 천재적인 우주 물리학자로 불리는 그의 현재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의 삶은 생명의 경이로움을 다시 일깨워 준다. 첫 아이가 세상에 나왔을 때 벅차게 밀려드는 생명의 신비감이다. 이성 간의 사랑을 뛰어넘은 두 인간이 부둥켜안고 지나가는 삶의 시간을 향한 사랑의 힘이다.

                                 


이 영화에서 신을 믿지 않는다는 스티븐 호킹은 살아가는데 특별한 철학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인류가 영장류 중에서 가장 진화된 종이긴 하지만 그저 평범한 별 주위를 도는 별 볼 일 없는 행성에서 살고 있죠. 수천억 개나 되는 은하계 중 변두리 은하계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문명이라는 동이 튼 이래로 인간은 우주의 근본적인 질서를 이해해 보려는 갈망을 품어 왔습니다. 만일 우주의 한계를 결정지어 줄 특별한 조건이 존재한다면 한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보다 특별할 수 있는 조건은 없지 않을까요? 인간적인 노력에도 마찬가지로 한계 따위가 존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제각기 다릅니다. 각자의 삶이 제아무리 불리해 보여도 누구에게나 이룩해내고 성공할 수 있는 무언가가 반드시 있는 법입니다. 생명이 있는 한 희망 역시 존재하니까요.”     

 

 생명이 있는 한 그 가능성에는 한계가 없다는 그의 말은 내가 머문 공동체가 어떤 가치를 지향해야 하고 어떻게 조화를 위한 노력을 해야 할지를 말한다. 나는 그 가능성을 믿는다. 생명을 우선으로 하는 사회, 단 한 명의 생명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하는 사회는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 는 사랑의 힘이 고갈되지 않은 사회라고 믿는다. 현실에서 그어놓은 한계는 뛰어넘으면 그만이다. 믿음과 생명을 향한 경외심에는 한계가 없으니까. 신이 있다면 그는 결코 고약한 존재는 아닐테니.






이전 06화 밍기뉴와 망가라치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